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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년 '파워봉사' 양현승 목사

"봉사는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것"

양현승 목사(세계종교평의회)는 66세다. 그 중 40여 년 넘게 '봉사'만 하면서 살아왔다. 그는 지난 3월 펴낸 저서(파워 봉사)를 통해 삶의 원동력을 전했다. 진정한 봉사가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것"이라고 했다. 양 목사에게 봉사가 녹아든 삶을 들어보고자 했다. 그는 손사래를 치며 "내가 뭘 했다고 그래…당연히 할 일을 한 건데…"라고 말했다. 그의 '봉사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다. 노스리지 지진 4.29 LA폭동 허리케인 카트리나 등 각종 재난현장 등에서 활동하며 이웃사랑을 몸소 실천해 왔다. 그에게 봉사는 '천직'이다.

◆단식 농성 사건

지난 1980년 광주에서 민중항쟁이 일어났다. 당시 LA에서도 한인들이 시위를 시작했다. 그때 한 교회에서 보이스카우트 디렉터를 맡아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양 목사는 시위 현장을 달려갔다.

"그때 시위만 해서 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곧바로 적십자사 LA혈액원으로 가서 헌혈을 하고 그 피를 한국으로 보내자고 했죠. 그리고 그 앞에서 한국으로 피를 보내자는 농성을 하면 세계 언론이 광주 항쟁에 더 집중할 거라 생각했어요."

양 목사는 즉시 광주에 헌혈한 피를 보내자는 전단지를 만들어 LA인근에 뿌리고 적십자사 앞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지미 카터 대통령에게 전문도 보냈다. 또 피가 광주로 보내질 때까지 무기한 단식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적십자사 내 군인용 야전침대에 누워 단식투쟁을 하는 가운데 순식간에 400여 명의 교민들이 적십자사에 몰려 농성에 참가했다. 이를 계기로 CBS NBC ABC 등 미 주요 TV방송을 비롯한 미국 언론이 광주 항쟁에 대한 소식을 상세히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 일을 겪으면서 왜 그런 안타까운 일이 생겼는지에 대한 갈등이 나를 괴롭혔죠. 나는 항상 '만약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 것인가'를 생각해 봐요. 그 갈등이 내 안에 생기면서 신학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적십자사와 계속된 인연

양 목사의 '봉사 DNA'는 고등학교(광주제일고) 때 부터 시작된다.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지만 특별 활동을 통해 남을 돕고 싶다는 생각에 '적십자사'에 가입했다.16세 때 가입한 적십자사 활동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적십자사를 통해 각종 봉사에 참여하는가 하면 미국적십자사 친선대사로서 스페인어로 된 AIDS 예방 프로그램이 아르헨티나에 제공될 수 있도록 중간다리 역할도 했다. 또 1985년에는 지진대비에 관한 적십자사 책자를 한국어로 번역했는데 이는 노스리지 지진 참사(1994년) 때 교민들에게 유용하게 쓰이기도 했다. 1997년에는 북한에 식량 후원금을 16만 달러나 보냈다.

"나에게 봉사는 숙명이기도 하고 소명이기도 해요. 주식 투자가들이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인터넷을 열어서 주식 동향을 보지 않습니까. 저는 신문을 보며 커뮤니티에 도울 일이 뭐가 있는지 매일 살피는 게 습관이었어요. 봉사는 주어지는 게 아니라 내가 찾아서 하는 겁니다."

양 목사는 지난 2002년 미국 적십자사로부터 '올해의 봉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 상은 미국에서 한 해 동안 활동한 자원봉사자에게 수여되는 것으로 13개 부문별 수상자 중에서도 가장 으뜸가는 것으로 한국인이 수상하기는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가슴 아픈 LA폭동

봉사의 추억 속에서 지금도 그의 가슴을 가장 울리는 것은 '4.29 LA폭동'이었다. 한인들이 직접적 피해를 가장 막대하게 입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양 목사는 폭동이 발생하자마자 적십자사로 찾아가 구호 식량인 인스턴트 식품 대신 한국인을 위해 한국음식을 제공하자고 제안했다.

"피해를 당한 교민들에게 음식이라도 잘 먹여야겠다는 생각에 된장 고추장 간장 등을 모으기 시작했죠. 순식간에 많은 음식이 모이기 시작했어요. 도움의 시기는 절대 기다려주지 않죠.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봉사에 대해 '안 된다'라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봉사가 필요한 곳이라면 무조건 'Yes'라고 답하죠."

양 목사는 LA폭동 당시 동양선교교회 주차장에 트레일러식 모빌 홈을 세워놓고 본격적인 구제활동을 시작했다. 그때 양 목사가 봉사를 하던 도중 LA다운타운에는 백악관 관계자들이 폭동피해 관련 회의를 열었다.

"그때 제가 백악관 각 부서 담당자들에게 '정말 상황을 파악하고 싶다면 직접 피해자들이 구제품을 받는 현장으로 나오라'고 했어요. 정부 관계자들이 그 뜨거운 여름 트레일러에서 힘들게 일하는 봉사자들을 찾아왔죠. 그 이후 각 언론과 각 단체를 통해 LA재건 캠페인이 일어나고 도움의 손길들이 더 많이 이어지게 됐습니다."

당시 양 목사가 주류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말한 "LA 재건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시작된다(Rebuild LA in people' s heart)"라고 말한 답변은 공익광고의 홍보멘트로 쓰이기도 했다.

◆봉사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것

양 목사는 봉사를 통한 외길을 걸으며 그동안 봉사에 대한 풀뿌리 운동을 벌여왔다.

"내가 했던 일은 나 혼자 한 것이 아니에요. 많은 사람이 함께 격려하고 격려받으면서 해냈던 일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함께 연결돼서 내미는 도움의 손길은 내가 봉사를 할 때마다 느끼는 희열입니다. 봉사는 사람이 연결되어 있어야 가능하거든요. 그리고 하나 더! 하나님과 연결되어야 그 이상의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는 '파워봉사'라는 책을 통해서도 영웅담이 아니라 부족한 사람들이 힘을 합쳐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사람 이야기를 담고자 했다. 그에게 '봉사의 끝'은 언제까지인지 물었다.

"봉사를 통해 한계를 느낀 적도 많지만 그런 부족한 인간의 모습이 오히려 정겹게 느껴지더라고요. 봉사의 끝 보다는 나중에 이 모든 일을 끝낼 때 '우리 정말 열정적으로 일했지'라는 한마디를 하고 싶어요."

☞양현승 목사는?

1946년 태어났으며, 과거에는 소위 ‘예수쟁이’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계획’이란 말을 가장 싫어했다. 하지만, 1978년 부활절에 미군 신분으로 DMZ 근무 중에 세례를 받고 신앙을 갖게 됐다. 당시 북한 병사들이 멀리서 쳐다 보는 가운데 미 육군 수통의 물로 세례를 받기도 했다. 이후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하고 1987년 미국연합감리교회(UMC)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의 인생 철학은 ‘가정과 교회와 커뮤니티를 한 몸으로 생각하고 땀과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열정으로 평상심을 유지할 때 샬롬(평화)을 누린다’ 이다.

장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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