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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인생] 배만드는 화가 남진우씨

일엽편주에 이마음 띄우고
허~ 웃음 한번 웃자

처음부터 그랬을까.

눈을 가리고 앞으로 앞으로만 달려나간다. 틀에 갇힌 일상 자신을 옥죄며 발자국을 찍어간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 지금껏 목젖이 보일 만큼 웃어본 적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한번쯤 뒤돌아 숨 돌릴 시간도 없다. 길가에 피어난 들꽃 하나 봐줄 여유도 없으면서 보란듯이 인생을 논한다. 꿈은 아득해져만 간다. 가끔 이런 자신이 한심해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 브레아에서 만난 화가 남진우(51)씨는 나무를 깎고 매만지며 눈을 떴다. 물 위에서 보는 하늘은 알던 것보다 훨씬 드넓었고 육지는 평탄했다. 눈길이 닿지않는 이름 모를 바위는 경이로웠고 나는 매우 작았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면 돼요. 조금 느리게."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떼와 해마다 봄에 맞춰 뽀얀 속살을 내미는 새싹 쪽빛 바닷물…. 천천히 둘러보면 세상은 온통 놀라움 뿐이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허세도 교만도 할 말을 잃는다. 어제의 미련과 오늘의 분노 내일의 불안을 조그마한 나무배에 실어보내자. 한번 웃어보자. 조금 늦어도 괜찮다.

#. 니스 냄새가 확 올라온다. 톱밥 날리는 바닥엔 합판.렌치.전기톱이 벽에는 나뭇결 매끈한 카약들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언뜻 봐도 공들인 티가 확연하다. 손때묻은 공구며 옛 애완견 코코를 그려넣은 로고 손떨림에 살짝 흔들린 이음매까지 모두 '진짜'다. "이거요? 제 12번째요." 살짝 눈을 맞추는가 싶더니 남진우씨는 다시 사뿐사뿐 니스칠에 집중한다.

족히 3~4명은 들어갈 수 있는 나무배가 도도한 자태를 뽐낸다. 제각기 다른 길이의 합판 조각을 구리철사로 잇고 유리섬유를 붙여 방수처리까지 마쳤다. 하루 8시간씩 2~3주 매달린 작품. 그럴듯 하긴 한데 물에 뜰까 부서지진 않을까 별생각이 다 든다. 오목하게 굽은 합판의 두껜 2cm도 채 되지 않기 때문. "튼튼한가요?" 하고 의심스런 눈초리를 보내자 자신 있단 얼굴로 한번 타 보란다.

"날씨 좋으면 1주일에 한 번씩 (바다에) 나가는데 아무 문제 없어요. 혹시 그 기분 아세요? 물 위에 둥둥 떠서 하늘과 바람을 품에 안는 느낌. 남들보다 빨리 가려고 노를 휘젓지 않아도 무언가를 얻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마음이 넉넉해져요."

낚시 뱃삯이 부담돼 손수 만든 지 5년째. 수없이 나무를 깎아내고 다듬으며 꿈을 이야기했다. 그의 손을 거쳐간 나무토막들이 서서히 모양을 잡아갈 때 제 마당처럼 뛰놀던 부산 앞바다가 넘실넘실 춤을 추고 어린 날의 소망들도 찾아왔다. 담담하게 이런저런 옛일을 털어놓는 남씨의 눈이 마치 17살 소년의 것처럼 반짝인다. 쏟아지는 추억을 나무배에 띄운다.

"한 20년 동안 꿈을 잊고 살았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그림도 그리고 싶고 건축가도 되고 싶었었는데…. 79년 이민오면서 노래방.카페.파이낸셜브로커 등 꿈과 관계없는 생활에 익숙해졌죠. 일에 치여 답답할 때면 밤바다에 위로받고요. 그러다 38살쯤 미대에 들어갔어요. 도저히 견딜 수 없었거든요."

그리고 싶던 바다를 맘껏 그렸다. 새파란 하늘 아래 홀로 덩그러니 남아있는 자신을 화폭에 담았다. 자연은 아무 말 없이 그를 이해했다.

#. 그림 그리는 손이라 보기엔 조금 거칠다. 합판을 뚫어 자신만의 문양을 새겨넣는다. 밤을 새고 나무와 씨름한 것도 여러 번. 그는 뻣뻣한 나무를 구부리는 것도 평평하게 하는 것도 오직 손에 달렸다는 진실만 거듭 확인했다. 손이 덜 가면 덜 간 만큼 틈이 생긴다. "배 만든 지 얼마 안 됐을 때 친구들과 빅베어에 갔어요. 한적한 호숫가에서 즐기는 뱃놀이에 신났죠. 그런데 바닥이 덜 메워졌나 봐요. 물이 보글보글 올라오는데 얼마나 심장이 철렁 내려앉던지. 씹던 껌으로 위기를 모면했죠(웃음)."

한 톤 높아진 남씨의 목소리가 천장에 울린다. "사실 배 만들기 전엔 비행기를 만들었었는데 그건 어디로 떨어질지 몰라 무섭잖아요. 배는 물에 뜨긴 하니까. 저 수영 좀 합니다(웃음)." 대화를 할수록 진지한 말씨가 조금씩 풀린다. 아지랑이처럼.

남씨가 만든 나무배는 호수용 바다용으로 나눠져 있다. 잔잔한 호수용은 바닥이 평평해 다리를 앞으로 쭉 뻗을 수 있는 반면 바다용은 속이 움푹 들어간 사발모양이다. 멋쩍게 웃는 남씨는 "어디서든 뜨긴 떠요"하며 니스가 고르게 발렸는지 여러 각도에서 살핀다. 남씨의 눈길이 스친 곳을 눈을 들어 다시 훑어보니 비슷비슷하게 보였던 1호 2호 3호… 작품이 다 다르다. 새겨넣은 문양도 만든 의도도 다르다. "호기심도 상상력도 때에 따라 달라요. 쓰나미나 지구 온난화 등 여러 가지 시나리오도 생각하고요. 혹시 모르죠. 성경에 나오는 노아처럼 큰 배를 짓게 될지도."

살랑 나부끼는 바람 한 줄
나무배가 이끄는 느림 미학


나무가 주는 포근함일까. 작업실을 가득 채운 크고 작은 나무배들이 온화한 기운을 만들어낸다. 이리저리 배를 쓰다듬는 남씨의 손가락이 따뜻하다. 노를 저으며 근심을 잊고, 자유를 얻는다고 했다. '오우, 뷰티풀'하며 감탄하는 남들의 시선을 즐길 줄도 알게 됐다. 40~45파운드 1인용 카약을 타고 해안선을 따라 흘러가는 시간. 그의 차에는 마음 울적할 때면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카약 3대가 준비돼있다.

"(배를 만들면서) 생각만 조금 바꾸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욕심만 부리지 않으면 평온해요. 물 위에 떠 있으면 아무런 생각이 안 들어요. 눈 앞에 보이는 드넓은 자연 앞에 나의 걱정은 점보다도 작은 먼지에 불과할 뿐이에요. 제일 큰 위로죠."

#. 남씨의 자연예찬이 계속된다. 깐깐한 화가 선생님은 사라지고 개울가에서 물고기 잡는 어린 소년만 남아있다. 사업도 해볼 만큼 해본 그가 "돈이 있으면 좋겠지만 바득바득 돈만을 위해 살고 싶진 않아요. 전 배에서 살려고요"라 하니 점점 동심만 부각된다. 얼굴도 꽤 동안이다. "아직 결혼을 안 해서 그런가(웃음). 심심풀이로 본 별자리 운세에선 제가 드리머(Dreamer)라고 하더라고요. 굉장히 맘에 들어요. 꿈 꾸는 사람, 멋있잖아요?" 꿈이 있어 실패가 두렵지 않은 모양. 톱밥을 들이마시고 사다리를 올라다니며 생긴 자신감은 요트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겠다는 꿈을 계획이란 이름으로 바꿨다. '곧'이라는 부사까지 덤으로 붙였다.

나무배 한 척 만드는 데 드는 재료비는 1200~1500달러. 거기에 카약 싣고 다닐 큰 차와 호수 이용비, 생태계 파괴를 막기 위해 반드시 받아야하는 점검까지 이런저런 조건도 많다. 설계와 조립으로 밤을 지새울 수많은 날까지 합하면 얼마 드는지 환산할 수도 없다. 다른 곳에 쓸 돈을 모으고 모아 만든단다. 그는 자연이 주는 평화로움과 직접 만들었다는 성취감이 훨씬 비싸다고 했다.

사진 속, 푸른 바다 위 나무배가 둥둥 떠간다. 약간 비릿한 바닷냄새가 나는 듯하다. 요 전날 다녀온 마리나 델레이에서의 추억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아, 진짜 좋았는데"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한다. 양옆으로 노를 젓는 그의 얼굴엔 근심이 없다. 살랑살랑 나부끼는 바람 한 줄기가 나무배를 이리저리 이끌어준다. 느림의 미학. 남씨는 스스로 '행복하냐?'라는 질문을 매일 묻는다고 했다. 그 다음 말을 재촉하자 슬쩍 웃으며 뜸을 들인다.

"자유를 얻었어요. 하고 싶은 일을 맘껏 즐길 수 있는 여유, 조금 느리게 가도 괜찮다는 깨달음, 돈이 아닌 새로운 가치의 발견…. 행복해요. 느릿느릿 제 손으로 짓고, 걸어가다 보면 인생살이도, 제 이야기도 더욱 넉넉해지겠죠."

거친 나무토막을 매만진 그 손끝에는 꿈이 있었다. 하늘을 날고, 바람을 타는 꿈. 멀리 있는 꿈을 이야기로 엮고, 기다림으로 방수처리했다. 열정은 현실화된 꿈의 단면이다.

글 =구혜영 기자·사진 =김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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