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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은 잘 익은 포도주와 같다

흐르는 시간과
살아있는 경험 만나
성숙 향해
달려가는 여정

'늙다'는 동사다.

혈기왕성한 한창때를 뜻하는 형용사 '젊다'와는 달리 계속 움직이는 현상이다. 흐르는 시간과 살아있는 경험이 만나 늙음을 이룬다. 나이를 먹는다는 큰 틀 아래 한 아이가 가족을 이루고 인생의 목표를 설계한다. 늙는다는 것은 성장의 연속 즉 성숙(成熟)을 향해 달려가는 여정이다.

'100세 시대' '인생 이모작' 등 고령화 시대를 반영한 문구들이 익숙해졌지만 아직도 늙음은 질병.가난.고독이다.

어린 것은 아름답고 늙은 것은 추하다는 대전제가 밑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가 초라하다고 느낄 땐 '늙음을 볼 때(25.2%)'고 나이가 많을수록 불공정한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늙음은 전염병과 같아서 노인과의 소통을 꺼리는 사람도 많다. 2005년도 보건복지부 고령화 보고서에 따르면 노인과 함께 지내는 것이 힘들다는 항목에 60대가 47.6%로 가장 많았고 이어 50대가 44.8% 40대 43.9% 30대 45.4% 20대 34.8% 순으로 응답했다. 늙음에 대한 나이 차별적인 고정관념이다.

반면 늙음을 미화하는 고정관념도 있다. 오래 살았기 때문에 지혜롭다는 식이다. '그것도 하나 할 줄 모르는~'으로 입을 떼고 '옛날에는~'이란 고루하고 답답한 문장을 잇는다. 늙었다는 자연 노화현상이 유일한 감투가 된다. 이와 관련 독일 성인 276명을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노년층의 자부심은 젊은이를 깎아내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연구진에 따르면 실험에 참가한 노인들은 젊은이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묘사된 기사를 읽고 자신들의 현명함을 내비쳤다.

수년 전부터 강조되고 있는 동안. 청춘예찬론을 들여다 보면 우리 세대의 불안감을 느낄 수 있다. 젊은이도 늙은이도 모두 늙음이란 단어를 거부한다. 교보생명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 10명 중 4명은 본인의 실제 나이보다 6~10세 젊다고 생각하며 실제 나이보다 무려 11~15세 젊다고 느끼는 이도 16.6%에 달한다. 선호하는 호칭에서 늙는다는 것에 대한 공포도 짐작할 수 있다. 절반 이상(56.4%)의 표를 얻은 호칭은 시니어(Senior) 그 뒤를 이어 실버(22.1%) 액티브 시니어(13.4%) 고령자(5.7%)로 조사됐다. 노인이라는 호칭은 전체 응답자의 2.3%에 불과했다.

결국 늙어간다는 불안감은 젊게 사는 법을 키워냈다. 또 특정 나이에 맞는 정상성에 의기를 제기했다. 서른에 결혼하고 쉰 즈음엔 나이에 맞는 사회적 지위를 갖춰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정상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스물엔 꼭 대학에 입학해야 하고 칠순 넘으면 집에서 쉬어야 한다'라는 사회적 나잇값이 성숙을 향해 배워가는 과정을 방해하고 있진 않은가.

퍼듀대학이 조사한 중년발달조사에 따르면 실제 나이보다 마음가짐이 인지능력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크다. 배움은 성숙하기 위해 밟아야 하는 단계다.

늙음은 저절로 온다. 얻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부여되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견뎌내야 한다. 공자가 이립(30세).불혹(40세).지천명(50세).이순(60세) 등 나이별로 목표를 정한 것도 잘 늙기 위해서다. 시간의 흐름 몸의 변화 지식의 습득.

흔히 노인의 비극은 늙은 것이 아니라 한때 젊었다는 말에 젊은 날을 하염없이 그리워하고 늙는 것을 두려워하는 모든 이는 공감한다.

하지만 꼭 그럴 필요 있을까. 성숙은 그 나이만큼 적립된 경험과 지혜를 토대로 한다. 여든 살 어르신은 파릇파릇한 17세의 감성과 30대의 열정 50대의 여유가 있다. 늙음의 기준은 주름살이나 무용담이 아닌 성숙도다. 성숙은 모든 늙어가는 것들의 목표이자 가치다.

문화속 '늙음 코드'
나이 먹는게 두려웠지만 지금은 행복하다




◆Songs

나이 듦에 관한 노랫말은 연령별로 다르다. 주로 노래 속에 등장하는 스물은 희망과 패기 서른은 염려와 고뇌 예순은 그리움을 이야기한다. 81년 대학가요제에서 입상한 스물 하나의 '스물 한 살의 비망록'을 보면 인생은 "해맑은 어제의 드높은 내일이나 설레이는 환상과 달려오는 너의 눈빛"이며 "우리들의 넓디 넓은 가슴은 하늘도 품고 또 남으리"라 외칠 만큼 희망차다.

스물은 부모의 잔소리를 떠나 원한다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기차표와 같은 것이다. 희망찬 미래도 잠시 직장.결혼.출산.성공 등 현실의 벽에 부딪힌 서른은 고뇌에 빠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가슴 속엔 아무것도 찾을 수 없고(김광석.서른 즈음에) 젊은 날의 높은 꿈이 부끄럽진 않을까 괴로워한다(노래마을.나이 서른에 우린). 때때로 아직 젊고 괜찮다며 위로하는 시기다.

사춘기와 같던 서른을 지나면 마흔은 어느 정도 평온하다. "실천은 더뎌지고 반성은 늘지만 그리 뼈아프지도 않다(안치환.마흔 즈음)"라고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도 생기고 지나간 스무 살 꿈에 집착하지 않는다. 가끔 다시 서른이 된다면 날개 달고 날아가고 싶다고(양희은.내 나이 마흔 살에는) 후회하기도 하지만 잠깐 뿐.

인생의 시작이라 불리는 예순을 만나면 모든 지난날은 빛나는 추억으로 남는다. 막내아들 대학시험 뜬 눈으로 지내던 밤들과 큰 딸아이 결혼식이 어렴풋이 기억나(김목경.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가끔 울기도 하고 꿈도 꾼다(이장희.내 나이 육십하고 하나일 때).



◆Books

나이를 언급한 책 제목도 많다. 같은 연령대의 공감을 얻어내기 위한 마케팅 전략이기도 하지만 세대별 생각과 생활 가치관을 간단하게 짚어낸 포인트다. 20대는 진취적이다. '성공을 하려면 이렇게 해라'라는 식의 자기계발서가 주를 이룬다. 제목도 노골적으로 '미쳐라' '세워라''쫓아라' '꿈꾸라' 등 명령형이 많고 재테크와 돈 관리법 사회에서 살아남는 법에 대한 책이 인기다.

30대의 키워드는 도전. 결혼이나 출산 경력 등으로 행동반경이 넓어져 불안하고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제목도 흔들린다. 다시 공부에 미쳐 도전하라는 책이 있는가 하면 평생 일자리에 목숨을 걸라는 안전지향형 책도 있다. 30대에 낳는 아이가 똑똑하다는 책도 있지만 결혼하지 않고 사는 법을 가르친다. 노랫말과 마찬가지로 서른은 사춘기다.

40대는 자신을 돌아보는 제목이 많다. 제대로 살고 있는가 이대로 괜찮은가 하고 물음을 던진다. 자아성찰 계통의 책이 많다. 지난 후회와 앞으로 다가올 후회 앞에 '발견' '프로젝트' '극복'이란 단어를 사용 평온을 유지하려 한다. 50대 60대는 시대라는 단어로 자신을 설명한다. 한 시대를 지나 새로운 시대를 살아간다는 식. 창업.건강.웰빙 등 현실적인 주제의 책이 다수다. 제목에서 보이는 불후.힘.가치 등의 단어는 젊은 날에 대한 추억이기도 하지만 아직도 그들이 건재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다른 연령대에 비해 책의 물량이 적다.

◆Issues

고민을 보면 나이가 보인다. 연령별 고민은 최대 관심사와 일치한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 20대는 취업과 연애 30대는 육아 40대는 권력에 괴로워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달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조사한 사회조사에 따르면 20대의 최대 고민은 취업(42.7%) 결혼 및 연애(23.3%) 등록금 등 교육비(18%) 전.월세비용(12%) 순이다. 특히 20대 초반(20~25세)의 55.9%가 취업을 고민 1위로 선택 실제 취업전선에 뛰어들기 전부터 실업 공포가 존재함을 보여줬다. 결혼과 직장에서 어느 정도 자릴 잡은 30대는 집 문제(30.7%)와 육아(30.3%)에 고민하고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진취적인 20대는 미래의 상황에 낙관적인 태도를 보이며 '지금보다 나아질 것(67.4%)'이라 희망했다.

사회.경제적 직위 면에서 안정기에 접어든 40대가 의외로 큰 불안감이 있다. 평안함을 표현한 노랫말이나 책 제목과는 사뭇 다른 결과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40대의 3대 고민은 자녀교육(31.9%)과 노후(29.6%) 고용 불안(14.7%)이다. 전문가들은 언제든지 현재의 삶이 송두리째 바뀔 수 있다는 불안감과 실패하면 다시 일어설 수 없다는 절망감이 40대를 짓누르고 있다고 설명했다.

50.60대는 노후와 건강 세대차이 등을 고민거리로 꼽았다. 갱년기와 은퇴가 맞물린 베이비부머 100명을 조사한 한 자료에 따르면 경제적 어려움(46%)이 가장 큰 불안감이며 자녀교육(30%) 건강(15%)이 뒤를 이었다.

당신에게 늙음이란?

일벌레의 삶 계속될까 두려워

"요즘 흰머리가 조금씩 난다. 그걸 볼 때마다 조바심이 든다. 뭘 크게 바라는 것도 아닌데…. 그저 직장이 있고, 먹고 살 수 있는 정도만 벌 수 있으면 좋겠다. 일자리는 없고, 대학원 갈 등록금은 너무 비싸다. 합격통지서를 받고도 기뻐하기 보단 입학을 늦춰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무언가 해보려고 도전해도 어느 정도 돈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몸으로 느끼고 있다. 내일이 보이질 않는다. 어렴풋이 평생 일벌레로 살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부모나 남편, 상사 등 누구에게 지시 받는 삶. 지금부터 30~40년 후,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전혀 궁금하지 않다." (이지연·27·LA)

Tomorrow never knows

"젊다는 게 꼭 좋은 것은 아니라고 본다. 경력도 없고 불안감만 있다. 서른이 코앞인데 아직 인턴이다. 직장도 변변치 않고, 모아둔 돈도 없다. 일찍 결혼해 가정을 꾸린 친구들을 볼 때면 괜히 부럽기도 하고, 화도 난다. 난 아직도 부모님께 손 벌리고 있는데…. 그래도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믿고 싶다. 희망이 없다 해도 지금은 달리할 수 있는 게 없다. 맡은 일, 하는 일 열심히 하다 보면 좋은 일이 있지 않을까. 내 생각이 어떻든 시간은 가고, 날마다 난 늙어간다. 기왕이면 좋은 날이 올 거라고 믿으며 고된 길을 걷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그마저도 없으면 일어날 힘도 없을 거다." (레베카 한·29·토런스)

나이 듦은 자유, 그 자체

"만약 스무 살의 나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리할 것이다. 젊음은 빛난다. 하지만, 젊음 못지 않게 늙음도 괜찮다. 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겠지만 나이가 들면 자유로워진다. 젊을 땐 이것저것 시도해보다 실패하면 무작정 슬퍼하고, 화도 내게 되지만 시간이 지나면 명예나 물질이 그리 대단한 게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깨우치게 된다. 늙어갈수록 자신의 한계와 능력을 알게 돼 일희일비하지 않고 넓게 본다.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생기고 어떠한 일에 유연한 태도를 보일 수도 있게 된다. 두 단어로 늙음을 설명하자면 자유와 겸손이랄까." (김금순·61·라카냐다)

시간의 소중함

"나이 먹는 건 서글픈 일이다. 갑자기 하던 일을 멈추면 쓸쓸하다. 일에 치여 지낼 때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몰랐다. '바쁘게 지낼 때가 좋았구나…'하고 울적해지면 시간의 소중함이 보인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어느 정도 남았을까 생각하면 모든 일에 후회보단 감사하게 된다. 지난날에 대해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어 행복하다. 젊은 날의 고통과 눈물, 온갖 힘든 일을 극복했기 때문에 오늘이 있다. 스무 살로 돌아갈 다시 그 고통의 시간을 겪고 싶지 않다. 지금 모든 것에 만족한다. 있는 것에 만족하고 그 안에 맞춰서 사는 삶도 나쁘지 않다." (박경숙·73·LA)

구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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