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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인생] 큐레이터 지연수씨

"미술은 사람 사는 이야기죠"

옛 삶 속에서 품어내는 마력
설명하면서 나도 배우는 미술
숨겨진 전통 찾아 늦깎이 공부
좁고 열악한 한국관에 속상


#. 말 잘 듣는 학생이 된 기분이다. 사근사근한 말씨에 고개가 끄덕여지고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손끝을 계속 쫓아간다. 큐레이터와 함께하는 일대일 Q&A 시간. 지연수(41.퍼시픽 아시안 뮤지엄 큐레이터)씨가 던진 한 마디에 몇백 년 전 문자도와 책거리(책이나 벼루 먹 붓 붓꽂이 두루마리꽂이 따위의 문방구류를 그린 그림) 속 극성스런 한인 맹모들과 조기유학생의 비애가 보인다. 해품달에나 있을 법한 액받이 무녀도 호작도의 호랑이로 둔갑해 있다. "설명하면서 배워요. 왜 이렇게 그렸을까 이건 무슨 뜻일까. 미술이라는 건 어떤 시대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도구라고 생각해요.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죠."

발맞춰 걸어가고 멈추기를 여러 번. 문득 한국관이 너무 좁다는 생각이 든다. 가로세로 열 두세 걸음쯤 옮기면 전시실 내 모든 작품을 볼 수 있다. 그마저도 백자나 갓 등 일부 문화재는 다른 전시실로 넘어가는 통로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아 쉬이 눈길이 가지 않는다. "항상 숙제라고 생각해 왔어요. 5년 전 박물관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큐레이터이기 전에 저도 한국사람인데 한국관이 좁고 열악하니까 속상했죠. 아 곧 박물관 리모델링 공사를 시작해요.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한국관이 확장됩니다."

ㅁ자 모양 중앙 정원을 가로질러 올 가을 들어설 한국관 전시실로 가는 길 그의 발걸음이 경쾌하다. 그럴 만하다. 변방 끄트머리에서 박물관의 중심으로 불리는 중국관과 일본관 사이로 진출한 것. 사방에서 빛이 들어 환하고 무엇보다 넓다.

"한국관은 이제부터 시작이죠. 지리적으로 문화적으로도 한.중.일을 붙여 놓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어요. 일본이나 중국 문화재를 보러 온 관람객들에게 한국만의 색을 보여줄 수도 있고요. 공부 더 열심히 해야죠. 몹시 설레네요."

한국 문화재에 관한 지씨의 설명을 들으면 저절로 느껴진다. 티벳 불상이나 중국 청화백자를 논할 땐 느낄 수 없는 따뜻함이 있다. 그에 따르면 한국의 美는 여백을 살리는 여유가 있으면서도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과 담백한 품격 그 자체다. 예술엔 국경이 없지만 피는 역시 진하다.

#. 박물관은 사람을 우아하게 하는 것 같다. 옛것이 품어내는 마력 때문인지 말도 발걸음도 조심스럽다. 따뜻한 햇볕이 창에 반사되는 것을 느끼며 옛 사람들의 삶을 생각한다. 여유롭고 느긋하다. 이곳에서 하루종일 일하는 지씨가 부러워진다. "전혀 느긋하지 않아요. 오히려 치열하다고나 할까. 무엇을 봐도 순수하게 감상할 수가 없어요. 작품과 작품 사이의 간격이나 흠집을 먼저 훑어봐요. 직업병이죠(웃음)."

1년에 기획하고 치러내는 전시회만 7~8개. 작품 감정이나 대여 요구 펀딩 의뢰는 특히나 시간이 걸리는 문제다. 거기에 작품. 개인 수집가 관리와 일반 관람객을 위한 투어 프로그램 홍보물 제작까지 큐레이터의 삶은 감상 위주로 돌아가지 않는다. 관람객처럼 예술을 느끼고 싶다는 그의 푸념이 이해된다.

지씨가 본격적으로 박물관에 빠진 건 11년 전. 아이를 어느 정도 키우고 나서 시작한 늦깎이 공부였다. 대학 졸업 후 9년간 펜을 잡지 않았다는 사실과 영어에 대한 부담감이 몰려왔다. 좋아하는 공부를 시작했지만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 지도교수가 해준 말이 기억에 많이 남아요. 일흔 여든 넘어 공부하는 사람들도 많고 너 혼자만 외국인도 아니라고. 서양인의 눈에 비친 동양미술이 아닌 정신.문화를 이해하는 연구를 하라고. "

눈 앞에 있는 물건들은 모두 나보다 나이가 많다. 수백 년 전 만들어진 도자기가 말끔하게 남아 있는 것을 보니 괜히 힘이 난다. 오래된 것이 주는 편안함이다. "그런데 참 이상해요. 다들 옛날 것에만 가치를 주니까요"하며 지씨가 입을 연다. 일제강점기 6.25 전쟁 이후 한국 미술에 대한 논문을 썼던 그는 근대 미술이 간과되는 것이 싫은 모양이다. "수치스러운 역사의 한 페이지에도 예술은 살아 있어요. 모두 전통이 되고 역사가 되죠. 알려진 것보다 숨겨진 전통들을 알아봐 주는 노력이 필요해요."

오늘은 내일의 과거가 된다. 내일은 모레의 과거가 된다. 오래된 것이든 새로운 것이든 그 만의 가치가 있다.

#. 도저히 접점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작품 사이에도 연결고리가 있다는 게 신기하다. 같은 주제를 놓고 다른 생각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구름 속에 반쯤 몸을 숨긴 용이 힘차게 승천하는 모습의 운용도 앞에 섰다. 알록달록한 색도 그렇고 둥근 눈이 귀엽게 느껴진다. 한참 왕권과 전설에 대해 설명하던 그가 용을 보면 무엇이 떠오르느냐고 묻는다. 무심코 "좋은 것"이라 답하며 질문의 의도(?)를 묻자 타인종 관람객들의 단골 질문이란다. 선과 악의 대립. 용 하나를 놓고 달라지는 동양과 서양의 견해가 흥미진진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이는 관람객들을 볼 때마다 중요한 것을 배워요. 받아들이려는 마음의 준비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 다름을 인정하는 동시에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림에서 눈을 옆으로 돌리니 이름 적힌 라벨이 보인다. 박물관에 작품을 대여해 준 개인 수집가의 이름이다. 박물관 수장고엔 전체 1만5000여 점의 미술품과 7000여 권의 고서가 있는데 전시회에 맞는 작품이 없으면 개인 수집가를 수소문해 부탁한다. 몇몇 한인의 이름도 보인다. 다른 이와 기꺼이 좋은 것을 나누려는 마음이 감사하다.

"같은 것을 본다는 것 자체가 아름다운 것 같아요. 저도 제 아이랑 같은 것을 보고 싶어 억지로 (박물관에) 데려가긴 하는데…. 여행만 가면 박물관만 찾으니까 한번은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한 지역에 박물관은 한 곳만 가자고(웃음). 같은 곳에 서는 것이 어렵지 느끼는 건 당연한 거죠. 그것이 교훈이든 단순한 즐거움이든."

박물관에서 배운 것이 무엇이냐는 말에 그는 선뜻 대답하지 않다가 나눔이란 단어를 꺼낸다. 아름다움을 함께 나누는 것도 옛 것에서 지혜를 얻는 것도 모두 나눔이라고 했다. 한국관을 나서기 전 작품과 작품 사이의 간격을 유심히 봤다. 그 가운데에 서서 자신이 아는 것을 나누는 지씨가 머리속에 그려진다.

열정은 나눔이다. 좋아하는 것을 나누고 싶은 널리 알리고픈 마음이다. 한없이 나눠도 사라지지 않는 바람이다.

▶퍼시픽 아시안 뮤지엄

46 N. Los Robles Avenue Pasadena CA 91101 (626) 449-2742

☞큐레이터란?

미술관의 모든 일들을 처리하고 수행하는 사람. 학예원(學藝員)이라고도 한다. 원래 큐레이터는 ‘관리자’에서 유래한 말이기 때문에 그것은 자료의 관리자 다시 말해서 미술관 자료에 관하여 최종적으로 책임을 지는 사람을 지칭한다. 연구, 교육 실무 외에 작품의 수집과 보존, 홍보, 전시 등을 담당한다. 어원은 '돌보다'라는 뜻의 라틴어 Cura.

구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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