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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마당] 백수를 위하여

조옥규 / 한국수필 등단

남편의 동기생 한 분이 은퇴기념이란 명목으로 친구부부를 초대했다. 실내 분위기는 알록달록한 풍선과 꽃 장식으로 화사하게 꾸며놓아 마치 유치원 재롱잔치에 온 듯싶은데 주인공이 말하기를 생업일선에서 물러나 할 일 없는 백수(白手)가 되었으니 기념할 일이 아니냐고 했다.

자리를 함께한 친구들은 학생시절 사과 같이 빨간 볼에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소년들이었을 터인데 흐르는 세월의 풍상을 고스란히 가슴에 안은 노목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마음만은 늙지 않았는지 어린아이들처럼 떠들썩하게 즐거워했다.

먼 길 돌아 무사히 여기까지 왔다는 안도감인가 아니면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는 떳떳함인가 구김살도 가식도 없는 해맑은 웃음소리가 온 방안에 그득했다.

백수를 위하여 축하의 잔을 들어 건배를 했다. 백발이 성성한 노병들의 얼굴에 세월의 흔적인가 주름살이 깊게 파여 있었다. 모두들 인생의 트랙을 한 바퀴 돌아 결승선이 가깝다 생각하니 무상한 세월이 잔에 녹아드는 것 같았다. 만만찮은 낮선 환경에서 역경을 헤쳐 온 노고를 알기에 코끝이 찡해지기도 했다.

무지개다리인양 태평양을 건너온 남편들은 과연 소기의 꿈을 이루었을까. 아이스크림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에게 설탕물을 얼려 주었다는 가슴 아픈 아비의 정을 누가 있어 이해할 수 있을까. 밤을 꼬박 새우며 빌딩청소를 했다는 부부 수중에 단돈 이 백 불을 갖고 엘에이 공항에 내렸다던 사람은 누구였더라.

남자들 술자리의 군대이야기처럼 이민 초기의 아픈 사연과 모험담이 오갔다. 당시만 해도 젊음과 보살펴야할 가족이 있어 용기를 낼 수 있었다고 회고하는 그들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가장들이었다.

자의든 타의든 서바이벌 게임처럼 모험심 하나 믿고 겁 없이 미국 땅을 밟은 친구들 중에는 성공한 분들이 적지 않다. 전문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 사업으로 성공한 사람 예술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 등 그들에게 이곳은 기회의 땅이자 약속의 땅이기도 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정직과 성실이 사회가치로 인정받는 토양에서 뿌린 만큼 거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수고로움에서 벗어나 무위백수(無爲白手)로 여생을 즐기는 것은 당연한 권리일 것이다.

경제적인 빈부만이 곧 인생의 성공여부를 가늠하는 척도일 수는 없다. 낯설고 설레는 새로운 땅에 뿌리를 내려 수확해보려는 개척자 정신은 결실과 관계없이 그 자체로써 충분히 값지다. 그런 불굴의 정신을 소유한 탐험가에게 이 땅은 분명 도전해 볼만하고 풍부한 가능성이 매장되어있는 미지의 서부가 아닐까.

망설이는 가족을 달래고 설득해 막상 미국으로 이주한 후 서너 달도 지나지 않아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남편에게 오히려 아내가 자식과 이곳에 남겠다고 선언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미국사람들은 실용주의정신이 투철하고 허례허식을 모르는 편이다. 분수를 지키며 노력한 만큼의 결과에 감사할 줄 아는 정직한 사회가 사람들을 이곳에 묶어놓는지 모른다.

백수잔치가 막바지에 이르니 은퇴 후의 계획으로 화제가 바뀌었다. 현업에서 손을 떼고 나면 과연 어떻게 소일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고민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인간의 수명이 백세를 기대할 수 있다고 하니 그만큼 백수의 기간도 길어질 것이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생존을 위한 투쟁과 의무라는 구속에서 벗어나 여력을 십분 발휘하여 자아실현에 전념할 수 있으면 좋을 것같다.

은퇴는 종점에 도착해 뒤안길로 입고되는 종착이 아니라 새로운 목적지로 출발하기 위해 자신을 점검하고 기름칠하고 시동을 거는 시발이어야 할 것 같다.

훗날 인생의 막을 내리고 저승으로 출발하기 전 자신만만하게 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을 읊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랴.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백수를 위하여." 백전노장들의 굵고 힘찬 목소리가 함성으로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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