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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마당] 아버지와 민들레

신성철 / 에세이포레 수필등단

'일편단심 민들레야'라는 노랫말을 들어본 본 적이 있는가? 봄 한나절 노랗게 핀 꽃은 이내 아물고 씨앗은 바람에 실려 새로운 세상으로 보낸다는 노랫말을 말이다. 민들레의 자리에 내가 들어가 보기도 하고 바람에 씨앗이 날린 곳곳을 찾아다니다 보니 나는 어느새 증조할아버지가 되어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게 된다. 슬퍼서 머리를 흔드는 게 아니라 일편단심 가족을 위해 달려왔다는 사실이 그런가 싶다. 또한 이제 내가 가야 할 길은 빈 껍데기만 가슴에 쌓일 것이기에 더욱 그럴 것이리라.

초등학교 졸업식은 다가오고 있었다. 남들은 중학교에 간다면서 즐거워했으나 나는 어려운 가정 형편상 진학은 꿈도 못 꾸고 있었다. 졸업식장에는 광주도청에서 근무하고 있던 큰 외삼촌이 이곳 담양까지 찾아왔다. 그리고는 기가 죽어 있는 나를 격려하며 큰 외삼촌은 함께 공부하자고 제안했다. 나는 그날로 외삼촌을 따라 광주에 내려갔다.

큰 외삼촌은 퇴근하고는 저녁 식사 후부터 나를 직접 개인지도했다. 낮에는 큰 외삼촌이 숙제를 내준 것과 복습을 위해 도서관에서 살았다. 그 기간이 3년이나 되었다. 어느 날 큰 외삼촌의 "이제 되었으니 중학 검정시험에 응시하라"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일제강점기 때는 중.고등학교 검정시험이라는 별도의 제도가 없었고 중학 검정시험에 합격하면 대학에 응시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마침 그때 금융조합사무원 채용시험도 있었다. 둘 다 기분 좋게 합격했다. 장성금융조합으로 발령을 받아 그곳에서 2년 6개월과 광주금융조합에 2년을 근무하는 중 8.15광복을 맞았다.

세월이 가고 조금씩 생활이 안정되어 갔다. 나는 늘 꿈꾸어왔던 대학에 진학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 결심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서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리고는 준비한 것을 실행에 옮겼다.

조선 신학교(한국 신학대학교 전신)에 합격했다. 기숙사와 고학할 장소까지 정해졌다. 희망에 들떠 있었다. 하느님이 나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고 감사기도를 드렸다. 앞날이 선하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한데 호사다마라 했던가. 어느 날 갑자기 가슴에 심한 통증이 왔다. 적십자병원에서 진찰을 받았다.

담당의사 선생님이 손가락과 청진기를 상반신의 여러 곳을 검사한 후 "과거에 결핵을 앓은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지레 겁을 먹고는 나도 모르게 대답 대신 머리를 끄떡였다. 계속해서 의사선생은 몇 가지의 질문을 계속하더니만 "예전에 앓았던 결핵이 의심스럽다"라며 엑스레이 기사에게 사진을 찍게 했다.

나는 큰 외삼촌 집에 있을 당시 시험공부를 하느라 무리하며 먹는 것이나 잠자는 것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다 보니 어린 나이에 결핵 초기를 앓았던 적이 있었다. 얼마나 결과에 민감해졌는지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그 다음 날 가슴을 조이며 병원을 찾아갔다. 담당의사 선생님은 어릴 때 결핵이 치료되면서 공동이 생긴 곳에 심한 찬바람의 자극을 받아 오는 통증이라 했다. 몸을 따뜻하게 하면 통증은 이내 없어진다고 했다. 병원을 나오면서 걱정이 없어진 나는 하늘을 날아오른 학이 된 기분을 느껴졌다.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버지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났다. 그 생각이 계속해서 이어지며 나도 모르게 서울역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그리고는 곧장 광주행 기차표를 구매하고 열차에 올랐다. 다음날 새벽녘에 광주에 도착했다. 그런데 집 대문에 '기중(忌中)'이란 흰 종이가 붙어 있는 게 아닌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들어가니 온 가족은 눈물바다가 되어 있었다.

아버지 시신 앞에 앉으니 어린 동생 다섯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앞으로의 생계와 어린 동생들의 교육이 염려되어 눈물도 안 나왔다. 어제 오후 4시경에 운명하셨다고 했다. 그 시간은 내가 병원에서 이상이 없다는 판정을 받은 바로 그 시간이었다.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아버지가 나를 부른 것이라 믿고 있다.

어느덧 미국생활이 40여 년이 다 되어간다. 그동안 어머니는 노환으로 큰 여동생은 교통사고로 내 밑 동생은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아내와 나는 가족에 관해 이야기가 나오면 아내는 배가 고파 어린 것을 등에 업고 동창생 집에서 밥을 얻어먹으며 눈물 흘렸던 이야기를 웃으면서 가끔 한다. 나머지 동생은 건강하고 많은 손자 손녀는 씩씩하고 예쁘게 잘 자라고 있다. 그들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 부부의 낙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살아갈는지 알 수 없으나 91년이라는 인생의 큰 등짐은 가족이라는 명제 아래 숨 가쁘게 살아왔다.

오늘도 우리 부부는 아침 산책을 하다가 길거리 모퉁이에 있는 노랗게 핀 민들레를 그 옆에는 회색빛 씨앗으로 뭉쳐진 목을 길게 내민 또 다른 민들레를 보게 된다.

해 뜨고 해 질 때까지 아버지가 살아온 과정을 나는 목이 아프도록 아버지의 과정을 똑같이 되풀이했다. 다른 것은 생각지 못하고 오로지 땅 깊숙이 뿌리박은 민들레의 생리를 닮은 민초(民草)인 나는 그래서 노란색을 좋아하나 보다.

언젠가 아버지를 만나게 되면 말하리라. "아버지. 아버지의 삶처럼 저도 바람의 방향대로 흔들리지 않고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다가 왔습니다. 눈물이 없는 이곳 동산의 무지개와 민들레가 피어 있는 곳에 놀러 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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