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깽 꼬레아노 (상) 나는 한인 후예] 이민 107년…우리에겐 '한인의 피' 흐른다
애니깽 할아버지 이야기
아버지·손자로 이어지고
김치·고추장 전통 계승돼
한국의 인연 놓치지 않아
제물포 카페서 회포 풀어
대한제국의 국운이 다해가고 있을 때였던 지난 1905년 4월4일 인천 제물포에서 남녀노소 조선인 1033명이 새로운 삶을 찾아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타국으로 향했다. 이들이 한 달 넘게 배(일포드호)를 타고 멕시코에 도착해 정착한 곳이 바로 메리다다. 우리 증조부모 뻘 되는 이들의 멕시코 도착은 미국 하와이(1902년 12월말 제물포서 출발)에 이어 머나먼 이국에서의 또 하나의 웅대한 ‘애니깽’ 한인 이민사를 쓰게했다.
지난 2005년 멕시코 이민 100주년을 맞아 한국 정부와 민간이 함께 나서 나름 성대하게 기념 행사를 벌였던 이 곳을 다시 찾았다. 이민 1세대는 물론이고 2세대까지도 대부분 작고한 지금, 손주뻘인 3세대가 이미 장년층이 됐고, 4세, 5세대, 심지어 6세대까지 한인 후예들이 이어져온 이곳. 이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미주에 거주하는 우리 자녀와 후손들이 앞으로 50년, 100년 뒤 그들의 조상인 ‘나’를 어떻게 생각하며 또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를 알기 위해서도 그들의 삶이 궁금했다.
# 김치·고추장으로 전통 계승
유카탄주 문화 유적지 관리를 총괄하고 있는 라몬 리 레혼(Ramon G. Lee Rejon·1958년생 53세·사진)씨를 메리다 시내 컨벤센 센터 주 문화부 사무실에서 만났다. 부친과 증조부 모두 멕시칸 여성과 결혼했기 때문에 그는 이미 외모상으로는 멕시칸이다. 한인 사회가 상대적으로 큰 미주 이민 사회에서는 한인끼리의 결혼이 많아 세대가 내려가도 외모상으로는 확연한 아시안, 한인들이 많지만 여기는 그렇지 않았다.
대부분의 애니깽 이민 한인 후예들 가족사는 리 레혼씨 선조 스토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민 조건이었던 4년간의 의무 노동기간을 끝내고 난 뒤였던 1910년을 전후해 한국은 일본에 국권을 빼았겨 이들에게 돌아갈 고국이 없어졌다. 남은 선택은 하루라도 빨리 멕시코에 적응해 살아남는 것밖에 없었다. 간혹 자녀들을 한인들끼리 결혼시킨 사람들도 있었지만, 워낙 작은 규모의 당시 이민 사회에서 그같은 커플은 오히려 소수가 됐다. 멕시칸들과의 결혼이 이어졌고 지금까지 100년이 넘어 내려온 ‘코리안 멕시칸’ 혈통이 만들어 졌다.
이민 3세대인 리 레혼씨는 “애니깽 노동자로 온 할아버지를 보지 못했지만 부친을 통해서 많이 들었다”며 “부친(1922년생, 작고)으로부터 어려서 한국에서 온 할아버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2남1녀를 둔 리 레혼씨는 이미 손주 손녀(이민 5세대) 넷을 둔 할아버지가 됐다. 그의 자녀들도 멕시코인들과 결혼했고 이미 혈통으로만 따지면 이민 100여년만에 한인 피 비율은 10%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제사, 차례 같은 한국 전통 관례를 해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라 레혼씨는 “없다”고 답했다. 그럼에도 “예전에 할아버지 집에서 사람들이 모여 이런 행사를 했다고 (아버지로부터) 들었다”고 설명했다. 여전히 그를 한인 후예로 붙잡아 두는 중요한 ‘연결고리’는 캐비지로 만들어 먹는 김치와 멕시코 시티 등에서 공수하는 된장, 고추장 등 한국 음식들이다. “이 음식들을 집에서 떨어지지 않고 먹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외모상 멕시칸이지만 한인 후예로서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은 다른 후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에게 ‘주어진’ 한국과의 인연을 놓치 않고 있었다. 개중에는 노예 생활을 하다시피 한 자신의 이민 선조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현실적인 삶의 어려움 속에서 자기 조상이 한인인지 여부가 중요하지 않는 사람들도 물론 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리 레혼씨처럼 ‘코리안’ 혈통을 자부한다. 이들 한인 후예들이 조직한 ‘한인 이민 후손회’에서 한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회원도 없다. 그럼에도 이들은 광복절등 한국의 큰 기념일에 모여 서로 친목을 도모하며 한국의 뿌리를 되살리고 있었다.
#메리다의 제물포 거리
애니깽 선조가 고국을 그리워하며 모여 술을 나누고 회환을 푼 카페가 있었다는 제물포 거리를 가보았다. 인천 제물포는 이들이 탄 배가 고국을 떠나 멕시코로 출발한 곳이다. 이 건물 한 켠에 예전에 이들이 모였다는 카페가 있었고, 여기서 고향, 가족, 조국을 생각하며 눈시울을 적셨다고 한다. 이들이 하도 제물포, 제물포를 말하니 카페 주인이 카페 이름을 제물포라고 고쳤다는 스토리도 있다. 이미 100여년이 지나 그 자리는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지만, 여전히 선조들의 눈물과 향취가 느껴진다. 제물포 거리 현판은 이민 100주년을 맞이해 지난 2007년 인천광역시에서 설치했다.
멕시코 메리다=송훈정 기자 hunsong@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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