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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인생] '윤동주 시인 소녀팬' 이성호 시인

71세 소녀의 동·주·앓·이

내일은 그가 떠난 지 67년째 되는 날.
잎새에 이는 바람에 괴로워하고
별 하나에 어머니를 그렸던 그 이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그리고 윤동주.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다. 이성호(71)씨는 참 귀엽다. 톡 쏘는 경상도 사투리로 '동주 오빠가~' 할 때면 10대 소녀 팬 같다. 쉴 새 없이 멋지다 순수하다며 자랑을 늘어놓는다. 좋아하는 마음은 절대 숨길 수 없다는 옛 사람들의 말이 옳다. 안경으로 가린 눈동자는 빛이 나고 발그레한 홍조가 피어 오른다. 바로 옆에 남편이 떡 하고 앉아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괜히 민망한 마음에 "괜찮으세요?"하고 묻자 남편은 "죽은 사람 질투해서 어쩌겠어요"하며 웃는다. 이씨가 말하는 동주 오빤 윤동주 시인이다. 이씨가 시인에게 반한 건 여고생 시절.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는 시구(詩句)에 마음을 뺏겼다. '스치운다'라는 동사는 집-학교-교회밖에 몰랐던 그의 답답한 마음을 위로해줬다. 생전 처음으로 가슴이 떨렸다. 엄한 목사 아버지 밑에선 남자친구도 시내구경도 불가능했던 50여 년 전 어느 날 윤동주란 이름 석 자는 일종의 해방으로 다가왔다.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낭만적이에요. 좋아하는 여자친구 집 담벼락 밑에서 노래를 부르며 시집을 선물하고…. 사실은 내 이야긴데(웃음) 그 때 받은 시집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였어요. 단어 하나 한 구절마다 '어머 어떡해'가 절로 나왔죠. 이렇게 아름다운 말을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하루 종일 생각했어요. 아버지께 시집 들이밀며 '이 사람을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기억이 나네요. 아버지가 허락한 첫 남자예요(웃음)."

속사포처럼 빠른 말소리가 귀에 쏙쏙 박힌다. 전쟁 통에 모두 가난하던 시절 시 한 구절에 위로 받던 어린 소녀가 눈에 선하다. 이씨는 시인을 따라 시상에 잠기고 같은 생각을 하고 싶었다고 한다. 한 사람을 반세기 넘도록 좋아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순수한가. 동경할 수 있는 존재가 있는 그가 괜히 부러워진다. "솔직히 말씀해주세요. 시만 보고 좋아하신 거예요?"라고 묻자 이씨가 웃는다. "처음엔 그의 죽음이 너무 애달파서 좋았는데…. 솔직히 얼굴이 너무 잘생겼잖아요. 내 주위에 동주 오빠 안 좋아한 사람이 없어. 바르지 건실하지 정말 나 크레이지(crazy) 같아요(웃음)." 한쪽 눈을 찡긋 감은 70대 소녀 팬이 너무도 귀엽다.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시구에 마음 뺏긴 여고 시절
윤 시인 숨진 일본 감옥터 찾아가 현지 시모임 참석
시 나누고 시인 찾기위해 8년째 '윤동주의 밤' 행사


#.처음 인사 나눴을 때부터 이씨 손에 들린 가방이 눈에 띄었다. 딱 보기에도 무거울 것 같다. 대신 들겠다고 나섰지만 꽤 소중한 물건이 들어있는지 고개를 양 옆으로 젓는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은근슬쩍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 이거요? 저와 동주 오빠와의 추억이죠"하며 책상 가득 종이꾸러미를 늘어놓는다. 꽤 넓은 테이블을 덮을 만큼 많은 사진과 신문 스크랩 시집 등이다. 말은 빠른데 손가락은 느릿느릿하다. 동시에 이것 저것을 설명하려는 그의 급한 마음이 절로 전해진다. 이리저리 뒤섞인 사진들 사이로 시인의 영정과 이씨가 보인다. 미국은 아닌 듯 하다.

"후쿠오카 감옥 터예요. 동주 오빠가 숨진 곳인데 지금은 감옥 대신 건물이 들어섰더라고요. 직접 영정 싣고 가서 한참 동안 보고 있었죠. 뜻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명복 빌면서. 2006년부터 3년동안 갔어요. 일본에 있는 시 모임 강연 등에도 참석하고요. 아 한국말 하는 동주 오빠 팬들이 얼마나 많은지…. 직접 보면 놀랄 거예요. 시 낭송도 한국말로 하고."

비행기 값 등이 부담되지 않냐고 묻자 좋아하는 사람에게 드는 돈이 아깝겠느냐고 되묻는다. 뭐라도 하나 더 주고 싶은 게 소녀 팬의 마음. 시인에게 조금 더 다가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한참 종이더미를 뒤적이더니 도쿄 릿쿄대에서 윤동주의 밤을 진행했던 한 일본인의 편지를 보여준다. 편지엔 한글과 일어로 번역한 서시와 아리랑이 적혀있다. 이씨는 팬들끼린 통하는 게 있다면서 언어가 아니라 시로 이야기한다고 했다. 서로 나눈 교감은 가끔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감옥 벽에 기대면 가슴이 먹먹해져요. 저렇게 좁고 후미진 곳에서 동주 오빠는 고향을 그리워했구나…. 너무 넋이 나가 있으니까 야나기하라라는 사람이 제 어깨를 주물러 주더라고요. 그래서 '됐다'하고 뿌리쳤더니 그 사람이 쓸쓸하게 얘기하대요. 동주 오빠 죽인 일본인 손이라 싫으냐고."

시는 용서를 알았고 사람을 엮었다. 꾸밈없이 단정했던 사진 속의 시인처럼.



#.이씨가 시집을 뒤적인다. 책장을 넘기던 손가락이 공중에 멈추기도 하고 안경을 끌어 올리기도 한다. 가장 좋아하는 시가 어떤 것이냐고 묻자 한참 동안 허둥댄다. "이게 문제예요. 하나만 고를 수가 없어요. 모든 것이 다 완벽해요. 오빠에겐 미안하죠. 오빠를 닮고 싶다면서 내 시는 너무도 쉽게 쓰여지니까."

글을 쓴지 올해로 어언 40년째. 시집 잘 가려고 국문과 들어간 그는 항상 무언가를 써왔다. 73년 미국에 이민 와서 받은 문화 충격과 장벽은 입을 다물게 했다. 그 때마다 짬짬이 시를 썼다. 스스로를 위한 위로였고 좋아하는 시인을 닮아가고 싶은 동경의 일부분이었다.

8년째 그는 자신의 집에서 '윤동주의 밤' 행사를 연다. 시를 나누고 시인을 찾는다. 1년에 하루쯤은 기억해주고 싶다고 했다. 자신에게 여러 가지 감정을 일깨워준 사람에 대한 존경의 표시다. 별이 쏟아질 것처럼 맑은 하늘 아래 별 헤는 밤을 읊는다.

"동주 오빠의 시는 제 기도문과 같아요.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끊임없이 샘솟아요. 특히 서시나 십자가 같은 시를 읽으면요. 누구나 그럴 거예요. 독한 말 하지 않고 부끄러움을 알며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잖아요? 이런 사람을 좋아하게 돼서 행운이에요."

사랑이다. 말없이 지어지는 미소 계산 없이 어떤 일을 꾸준히 하게 하는 힘 포기하지 않고 지켜내는 마음. 사랑과 열정은 동의어다. 사랑 없는 열정인생이란 없다.

구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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