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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집 아가씨는 예쁘다? 그녀는 바빴다

구혜영 기자의 '알바 스토리'

TV속 청순·연약한 아가씨는 거짓말
장미 한송이 위해 가시 긁고 철사 꽂고
꽃보다 아름다운 보내는 이 마음에
치열한 경쟁심·이기심 후회 속으로…


꽃집의 아가씨는 바빴다.

TV속 청순하고 연약한 꽃집 아가씨는 온데간데없었다. 목장갑과 철사가 손에 익었다.

사실 꽃집 아르바이트는 어른이 되면 꼭 해보고 싶던 어릴 적 꿈 중 하나였다. 예쁜 것만 보고 싶었던 그 시절의 아득한 꿈.



꽃집의 하루가 궁금해 무작정 찾아갔다.

우뚝 솟은 에퀴터블 빌딩 내 앤지스 플라워(Angie's Flowers)는 9시에 문을 열었다. 새벽에 LA다운타운에서 사온 싱싱한 꽃향기가 멀리 퍼져간다. 꽃병에 꽃을 꽂는 손길이 분주하다. 꽃병에 꽃 색깔을 맞추려 이리저리 대보는 모습이 너무나 예쁘다. 내가 알던 꽃집의 이미지다. 안심이 된다.

가장 먼저 주어진 일은 컴퓨터나 팩스 주문을 확인하는 일. 밸런타인스 데이가 코앞이다 보니 아내나 애인에게 보내는 꽃이 주를 이뤘다. 멀리는 플로리다부터 가깝게는 같은 빌딩으로 보내는 꽃도 있었다.

주문서를 확인하는 것 하나로도 가슴이 쿵쾅쿵쾅 뛴다. 꼭 연애편지를 훔쳐 보는 느낌이다. 지금껏 뾰족하고 각이 선 내 글씨체를 개성 있다고 좋아했건만 카드에 쓰려니 망설여진다. 꽃 보내는 사람의 마음이 제대로 전해지길 빌며 둥글게 꾹꾹 눌러썼다. 진심을 담았다. "You will always be my one and only valentine. I love you"를 쓸 땐 부러웠고 "엄마 항상 맛있는 밥 해줘서 고마워요"는 기특했다. 꽃 말고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랐다.

꽃집은 온갖 사연으로 어수선하다. 한쪽에선 장례식용 백합을 다듬고 다른 쪽에선 개업식 화환을 준비했다. 곳곳에는 웨딩 카탈로그가 붙여있다.

부하직원들에게 점수 따야한다며 꽃을 주문하는 부장님부터 병문안용 꽃 바구니까지 쉴새없이 손님이 몰려온다. 여유있는 꽃집의 아침은 없다. 한 젊은 남자가 쭈뼛쭈뼛 꽃집으로 들어선다. "사실 제 여자친구랑 좀 싸워서요. 화해하고 싶은데 어떤 꽃이 좋을까요?" 2달째 연애중인 이기훈(21.USC)씨의 말투가 귀엽다. 꽃을 고르는 남자의 뒷모습이 신선했는지 사장은 "잘 될 거예요"하며 핑크색 장미 두 송이를 더 넣어준다. 보는 내가 괜스레 뿌듯하다.

장갑 끼고 따르라는 실비아 선배(?)의 말에 장미 뭉텅이를 수레에 실었다. 냉장고 안은 너무나 춥고 꽃 무게도 만만치않다. 가장 인기있는 꽃이다 보니 수요도 공급도 많다.

우선 양동이 십여 개에 물을 채웠다. 수돗가부터 창고까지의 거리는 10m정도. 평소 운동하지않는 게 티가 난다며 "꽃값이 괜히 비싼 게 아니야. 알겠죠?" 란다. 가시를 제거하려 잠시 물에 적신 장미를 다시 꺼낸다. '이런 스테이플러 클립으로 긁어지겠어?'라고 생각했는데 보기보다 힘이 좋다. 클립 사이에 줄기를 끼우고 요령 있게 긁어내는 것이 정석. 굵은 가시를 한번에 긁겠다고 힘을 주면 꽃이 줄기와 분리되는 비극도 종종 초래된다. 뾰족한 가시는 장갑을 껴도 소용없을 만큼 날카로웠다.

그 다음엔 링거 꽂기. 철사로 줄기를 감아주는 작업이다. 꼭 포도당 주사가 연상돼 내 멋대로 링거라 이름붙였다. 꽃받침 아래 1cm정도 살짝 철사를 꽂고 나선형으로 감으면 꽃이 꼿꼿하게 선다. 정맥을 찾지못한 주삿바늘처럼 여러 번 찔렀더니 진물이 줄줄 흐른다. 처음엔 어렵더니 한 100번 반복하니까 관통하지 않으면서 한번에 쿡 찌르는 비법을 터득했다.

거뭇거뭇 색이 변한 꽃잎이 보기 싫어 대충 찢었더니 "아래부터 살짝 뜯어내야 해요. 연약하니까"라는 선배의 조언이 들려온다. 꽃받침을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 떼어낸다. 겹겹이 싸인 꽃잎이 새 옷을 입는다. 링거를 꽂은 장미는 줄기를 조금씩 사선으로 잘라 영양제를 주입시킨다. 댕강 자르지 않고 조심스럽게 잘라내야 한다. '조심'과 '살짝' 사이가 너무 어렵다.

철사와 원예용 가위 칼 잡은 지 5시간째. 링거 꽂고 꽃 나르는 손길이 눈에 띄게 빨라졌다. 엄지 손가락은 장미 독이 올랐는지 찌릿찌릿하다. 밸런타인스 데이에 빨간 장미 사주는 남자랑은 만나고 싶지 않을 정도다. 탁자와 바닥에 떨어진 장미 꽃잎이 수두룩하다.

우스갯소리로 이거 모아서 장미 목욕하고 싶다고 하니 선배가 "농약 묻은 장미꽃잎을 왜 물에 넣는지 몰라. 그게 좋아?"하고 되묻는다. 모두 한바탕 웃었다. 갑자기 꽃 배달 가라는 사장님의 명령이 떨어졌다. 괜히 가슴이 떨린다. 세상에 꽃 싫어하는 사람이 있겠냐마는…. (혹시 있을지도 모르지만) 활짝 웃는 모습이 보고 싶어 재빨리 주문을 외웠다. 제발 입꼬리가 귓가에 걸리도록 좋아해라! 올망졸망한 꽃 바구니를 들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10층 으리으리한 사무실에 들어서자 아무도 없다. 멀리서 눈이 마주친 한 여성에게 "아믹씨 계세요?"하고 물었다. 딱딱한 인상의 여성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다가온다. "전데요." 눈이 싱글벙글 웃고 있다. 꽃 속에 파묻힌 카드를 먼저 꺼낸다. 누가 보냈는지 알고 있을까. 어떤 내용의 메시지가 담겨있을까.

퇴근하기 전 한참 동안 내가 떼어버린 꽃잎과 잘라낸 줄기를 바라봤다. 수북하게 쌓여있다. 사실 그렇게 많이 떼어버리지 않아도 괜찮았을 것이다. 조금 마른 꽃잎은 완전히 말려 포푸리로 만들어도 괜찮은데…. 잠시 슬퍼진다.

나의 가시가 다른 이의 손가락을 찌르고 있진 않은지 내 욕심이 다른 이의 줄기를 댕강 잘라놓고 있진 않은지 걱정된다. 치열한 경쟁과 이기심 못난 마음이 후회된다.

꽃집에서의 하루는 숨가빴지만 한가지는 분명히 느꼈다. 꽃을 키우고 다듬고 보내는 마음이 꽃보다 아름답다. 결국 꽃은 사람이다. 아프게 하지 마라. '조심'과 '살짝' 사이에 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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