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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청춘이다] 플러싱 경로회관 유종옥 부관장

50세에 '만학'…60세에 소셜워커 '인생 2막'

진짜 원하는 일이 무엇인가
50세에 사회복지 공부 결심
여고 졸업후 수십년만에
일하면서 억척스레 공부
외동딸도 '봉사 인생' 진로
엄마 이어 소셜워커 길 걸어
의지 있으면 나이 상관없어
또래 노인 도우며 '즐거운 삶'


매일 점심시간 전후로 250여명의 노인이 플러싱에 있는 뉴욕한인봉사센터(KCS) 플러싱경로회관을 가득 메운다.

넓은 회관 안에 있는 작은 사무실은 늘 복지혜택과 관련한 문의를 받으려는 노인들로 북적 이는데, 이들의 민원을 일사천리로 해결하는 사람이 있다. 소셜워커인 유종옥(60·사진) 부관장이다.

유씨는 시 정부에서 제공하는 메디케이드·메디케어, 노인아파트 입주신청, 노인 렌트 인상 면제 프로그램 등 은퇴한 한인 노인들이 복지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매일 수십 명의 민원을 해결한다.



“경로회관에서 돕는 노인들은 나와 나이가 비슷거나 조금 많은 연배”라며 “이들을 도울 때마다 입장을 바꿔보고 ‘언젠간 나도 도움이 필요할 수 있다’는 생각하면 이들에게 헌신할 수밖에 없다. 나도 은퇴할 나이가 되면 어떻게 스스로 렌트를 내고 병원에 다닐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의 나이 60세. 환갑인 유씨는 “지난해 헌터칼리지에서 사회복지학 석사과정을 마친 후 소셜워커 칭호를 얻게 됐을 때 인생의 전성기가 막 시작됐다”고 말하며 어깨를 들썩였다.

환갑의 나이에 청춘이 꽃피운 것은 유씨가 50세에 발견한 꿈 덕분이다. 아버지를 8세에 여읜 가정형편 때문에 인천여고 졸업한 것이 최종학력이었던 그는 10여년 동안 뉴욕일대 네일업소 기술자로 일하다 지난 2001년 나약칼리지에 사회복지 전공으로 수십년 만에 공부를 시작했다.

“단순 노동직에 종사하다가 시력이 나빠지자 특별한 목표 없이 살던 지난날을 돌아보고, 진짜 원하는 일이 무엇인가 고민하게 됐습니다. 간호원 등 남을 돕는 일을 꿈꿨던 젊은 시절을 떠올리며 사회복지 분야의 전문가로 변신하려고 마음 먹었죠. 사회복지 전공 공부로 제 노후를 대비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 더욱 열정적으로 공부하게 됐습니다.”

유씨는 대학 4학년이었던 2004년부터 뉴욕한인봉사센터(KCS)에서 파트타임, 이듬해 KCS 산하 플러싱경로회관 케이스매니저로 일했다. 이에 만족하지 않고 소셜워커가 되려고 대학원 진학을 지망, 지난 2008년에 시 노인국의 장학생으로 선발돼 헌터칼리지에서 2년 동안 사회복지학 석사과정을 거쳐 올해 졸업했다. KCS는 그의 열정을 높이 사서 지난해 경로회관의 모든 사무업무를 총괄하는 부관장으로 승진시켰다.

그는 “대학원에서 영어 때문에 또래 학생들보다 과제물을 하기 힘들고 발표 할 때마다 긴장하기 일쑤였다”면서도 “공부가 재밌어서 열심히 한 결과 영어가 부족했는데도 꽤 많은 A학점을 받았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유씨는 KCS에서 근무하기 시작한 2004년 이후 매주 토요일 시 노인국 ‘프렌들리비지팅’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한인 독거노인들을 4~5명을 방문하고 10여 명에게 전화로 말동무가 돼 준다. 대부분 회관에 찾아오기 힘든 조건의 노인들이다.

그는 “노인들이 자식 걱정하는 등 소소한 이야기를 털어놓고 외로움을 나타낼 때마다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 삶의 위로가 된다”면서 “가장 흐뭇하고 보람된 시간이어서 아무리 바빠도 7년째 하루도 빼먹지 않고 토요일 시간대를 비워놓고 있다”고 말했다. 유씨는 방문시 노인들이 시 정부에게 받은 각종 공지문과 서류들을 해석해주고 직접 업무대행을 실시하기도 한다.

유씨가 이 같이 인생의 2막을 시작하기까지 이겨내야 했던 역경과 고난은 무수했다.

지난 1988년 남편과 한 살배기 딸을 데리고 미국에 이민 온 이후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봉제공장, 샐러드바 등에서 일하며 고된 이민생활을 이어갔다. 잭슨하이츠인 74스트릿에서 기념품가게도 마다하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이 도박 중독에 빠져 생활비를 탕진했고 심지어 결혼반지까지 팔아 노름하는 것이 일쑤였다. 유씨는 스스로 변호사를 선임해 남편과 1992년 이혼하고 2년 뒤 지금의 남편과 재혼했다.

유씨는 덤덤한 말투로 이 같은 과거를 회상했다.

“오로지 미국에서 생존하기에 급급했던 시절입니다. 하지만 내가 진정 원하는 일을 추구하고 자신을 위해 투자하기로 결심하니 미국은 역설적이게도 기회의 나라임을 알게됐습니다.”

연방·주정부는 학자금지원프로그램(TAP)프로그램을 제공, 유씨는 이를 신청한 뒤 등록금의 절반에 가까운 금액으로 대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공부를 하고자 마음만 먹으면 나이 상관없이 자기계발할 수 있습니다. 과거 소년가장이었던 오빠와 6남매가 살아가는 가정형편 때문에 고교 졸업 후 대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눈치 보이고 돈도 없었죠. 지금은 시대도 변하고 미국의 교육 환경도 좋아졌습니다. 언제든 도전하세요.”

유씨는 억척어멈이다. 늦은 나이에 공부하기로 결정한 뒤 모든 학비를 스스로 벌면서 하나밖에 없는 딸을 양육해 왔다. 나약대학교에서 공부를 하면서도 수입이 짭짤했던 네일업소에서 계속 일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사회복지 전공으로 대학 다닐 땐 딸이 고교생, 대학원 재학할 시기엔 딸이 대학생이었습니다. 공부하는 동시에 돈 버는 와중에 오히려 딸 아이와 유대관계가 좋았어요. 학교 에세이 등 과제물을 완성하면 영어가 편한 딸에게 검토 받으면서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재미있는 모습이죠(웃음).”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 사이언스를 전공하던 유씨의 딸 이슬기(24)씨는 유씨와 함께 프렌들리비지팅 프로그램 등의 봉사활동을 하면서 진로를 바꿨다. 유씨의 꿈이었던 소셜워커가 되기로 결심한 것. 이씨는 코로나에 있는 카톨릭 노인아파트에서 소셜 코디네이터로 지난 2년 간 일하고, 올해 가을학기부터 포담대학원 사회복지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유씨는 “딸은 대학교 다닐 때부터 너싱홈에서 인턴생활할 정도로 봉사활동을 좋아했다”면서 “내가 대학원 다닐 때 구입한 전공서적들을 딸이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게 신기하고 대견하다”고 말했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 50세에 공부를 시작한 뒤로 더욱 높은 기준의 꿈을 꿀 수 있게 된 유종옥씨. 환갑을 넘기는 새해 다짐과 꿈은 무엇일까.

“뉴욕에 있는 대부분의 한인 경로회관이 자체소유의 건물이 없이 렌트를 내면서 장소를 빌리는 실정입니다. 따라서 수용 가능한 인원 제한도 있고 이들에게 다양한 세미나와 강습을 하기엔 장소의 제약도 있죠. 은퇴하기 전에 넓은 회관이 건립돼 더욱 많은 한인 노인들에게 복지혜택을 제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양영웅 기자 jmhero@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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