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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엽 기자의 귀연 일기-2] 하얀 눈발속에 빨간빛 더하는 고추 바라보며 삶 묵상

한달 전 고추를 땄다. 그리고 말리려고 고추를 마루에 널었다. 그 때 정말 아찔한 경험을 했다. 어릴 적 농촌에서 자라기는 했지만 햇빛에 말리려고 널찍하게 펴놓은 고추들을 유심히 지켜본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마루 위의 고추들은 마치 불꽃과도 같았다. 마루 전체에 불이 붙은 듯했다. 2~3분 동안 마루 위 고추들을 바라보자 머리가 빙빙 돌았다. 그 강렬함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불이라는 게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끄는 묘한 마력이 있다.

불구경에서 눈을 떼기 어려운 것도 그런 이유일 게다. 불구경 가운데 가장 많이 해본 게 캠프의 모닥불이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장작불의 선홍색을 바라 보며 사람의 능력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그런 색깔이라는 생각도 해봤다. 살아 꿈틀거리는 듯한 그 기운은 또 어떤가.

고추는 '태양의 식물'이다. 태양 없는 지구는 애초부터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지구상의 만물 가운데 특히 고추는 태양의 전령 같은 존재이다. 색깔부터가 태양을 그대로 빼 닮았다. 성질 또한 흡사해서 뜨겁기 짝이 없다. 햇빛이 풍부해야 잘 자라는 점도 그렇다. 해는 음양 가운데 양을 대표한다. 흔히 남성의 기관을 가리켜 고추라고도 하는데 이런 점에서 고추는 그 상징은 물론 물성까지도 '양성'이다.



빨간 것들은 모름지기 생명과도 맞닿아 있다. 지구에 생명을 불어넣는 태양은 말할 것도 없다. 사람을 비롯한 대부분 동물의 피가 빨간 색인 것도 마찬가지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고추가 들어가 있지 않은 음식 혹은 빨간 색이 나지 않는 음식은 생기가 없어 보인다.

이스트 밸리는 해가 조금 귀한 곳이다. 계곡 지형이라 계절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략 30분쯤 해가 늦게 뜨고 또 일찍 진다. 일조 시간이 짧다 보니 어딘지 겨울 분위기는 한결 더한 편이다. 그럼에도 이 곳 동곡리를 삶터로 택한 건 계곡 지형이 전체적으로는 남쪽으로 열려있기 때문이다.

풍수지리는 전혀 모르지만 본능적으로 북쪽은 산으로 막혀 있고 남쪽은 터진 곳에 끌렸다. 미국에서 한국을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햇수 기준으로 주말마다 2년 가까이 전국 팔도를 돌다시피 하며 땅을 찾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남향 여부였다.

지금 마루 위의 고추가 무언으로 그때 나의 선택을 옹호해주고 있다. 정남향으로 자리 잡은 나의 누옥에서는 동네가 다 내려다보인다. 동네는 전체적으로 1970년대 언저리에 머물러 있는 듯한 농촌 풍경이다. 크리스마스 시즌임에도 저만치 떨어진 마을 회관의 스피커는 아침 7시 캐럴 대신 여전히 뽕짝 가요로 마을 사람들의 잠을 깨운다.

'띠이~잉'하고 이어지는 아코디언 선율 때문에 마을 회관의 뽕짝은 특히 저만큼 흘러가버린 옛날 맛이 난다.

그러나 이스트 밸리에도 내 눈엔 그 나름의 크리스마스가 깃들어 있다. 여전히 푸른 앞 산의 소나무 숲은 크리스마스 트리의 군락이나 다름이 없다. 무엇보다 짧은 겨울 해를 뚫어지라 바라보며 아직도 우리 집 마루를 지키고 있는 끝물의 고추들은 크리스마스 트리에 매달려 있는 빨간 전구들을 연상시킨다.

예수의 탄생은 인류 역사에서 죄과를 형벌이나 되갚음이 아닌 사랑과 베풂으로 묻는 새로운 정신을 확립시켰다. 마루 위 고추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빨간 옷을 입고 사랑을 선물하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떠올린다. 그러고 보면 사랑은 확실히 삶을 삶 되게 하는 섭리이다.

12월 하얀 눈발 속에서도 그 빨간빛을 더하는 고추가 그걸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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