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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마당] 꿈은 이뤄지라고 있는 것

황명숙/재미수필문학가협회 회원

심심풀이로 옛날 일기장을 뒤적였다. 1987년 여름의 휴가 기록이 언뜻 눈에 잡힌다. 로드아일랜드주 뉴포트에 있는 아들의 고등학교 졸업식에 갔다가 영문학 학술대회 참석차 터프츠 대학에 와 있는 뉴욕 친구를 방문하고 오리건주 포틀랜드로 가서 형제들을 만난 기억이 되살아난다.

열다섯 살 어린 나이에 엄마품을 떠나 동부에 있는 사립학교에서 공부한 아들은 그날 "지난 삼 년은 세상의 엄마가 아들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이었다"며 졸업 소감을 말했다. 혼자 사는 엄마가 외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하나 뿐인 아들을 멀리 보냈던 이유를 공개하듯 어른스럽게 감사를 표현했다.

외지에서 엄마가 보고파 힘들었지만 미국 최고의 교육 조건을 누릴 수 있는 특혜가 자랑스러웠고 고풍의 건물과 넓은 교정이 길 건너 바다로 이어지는 시골 분위기를 사랑했단다. 다양한 경험의 기숙사 생활도 재미있었다며 그곳 떠나기를 아쉬워했다.

십여 년만에 만난 친구하고는 극장에 가서 연극을 보고 박물관을 다녔다. 박사학위를 한 후 전공인 문학 분야 외에도 미술평론 저서들을 내고 고전 음악에도 통달한 친구이다. 이틀간의 주말을 우리는 보스턴 시내를 걸어서 돌아보았고 문화와 삶의 지혜를 나누었다. 이웃 도시의 하버드 대학을 구경갔을 때는 지나는 사람 별로 없는 잔디에 두 팔 벌리고 누워서 높은 하늘을 우러르며 깊어지는 서로의 우정을 음미했다.

다섯 형제가 모처럼 만난 일주일 동안은 실컷 먹고 얘기하고 웃고 즐겼다. 둘째 오빠의 별장에 갔던 날은 울창한 숲속을 올케들과 하이킹하고 잔잔한 호수에서는 오빠와 뱃놀이를 했다. 골프에 문외한인 나는 넓고 푸른 골프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환상의 기분이었다. 조카들의 식구까지 합세한 대가족의 바다 낚시는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 해변에서 즉석 회를 만들어 미리 준비한 고추장 양념에 찍어 먹는 맛도 맛이지만 버려지는 물고기의 내장을 탐내어 모여드는 갈매기떼의 오르내리는 날갯짓은 천상의 멋이었다. 배를 타고 바다에 그물을 내리는 게잡이나 모래를 파서 긁어 모으는 조개 캐기는 난생 처음 해보는 경험이었다.

형제중 혼자만 멀리 LA에 사는 나에게는 가깝게 모여사는 그곳 가족간의 공동체 의식이 가슴에 사무치도록 부러웠다.

집에 돌아와서는 여행에서 받은 새로운 자극과 영감 때문이었는지 변화를 꿈꾸는 일기를 썼다. '내년에 오십 세로 은퇴를 하고 LA를 떠나 다른 직업을 구해볼까? 자연에 접할 기회를 자주 찾고 주변 사람들을 더 많이 사랑하고 잘 먹고 운동해서 건강을 유지하고 그리고 문화생활을 하자.' 그 당시 내가 처한 처지가 불만이거나 불행해서는 아니지만 환경과 삶의 내용을 바꾸는 내 노력 여하에 따라서 삶의 질과 깊이를 달리 할 수 있으리라는 신념으로 새로운 꿈을 꾸었었다.

평범하면서도 구체적인 생활목표를 그렇게 세우고는 꿈에서도 그 꿈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었다. 언제부터인가 꿈은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나는 여전히 방황하고 좌절하고 도전하면서 이십여 년을 열심히 살아왔는데… 일기장을 뒤적이지 않았더라면 내가 살고 있는 현재를 그 여름의 꿈과 연결시키지 못한 채 그냥 지나칠 뻔 했네.

일기를 읽고 나서 그간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니 쉰네 살에 퇴직을 해서 원하던 공부를 몇 년 했고 쉰 일곱에는 가르치는 직업을 얻어 관광의 도시 몬트레이로 이사를 갔다. 매일 강아지를 데리고 바닷가를 산책하면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분신인 나 자신을 사랑했고 책 읽기에 푹 빠지기도 했다. 소셜워커의 정규 직업 이외에도 주말 한국학교 교회학교를 맴돌며 일에만 바빠 늘 메말랐던 LA 생활 이십오 년에 비하면 몬트레이의 십 년은 엄청난 변화와 정서적 여유 자기 발견의 연속이었다. 은퇴한 후로는 LA에 자리 잡은 아들네 가까이 살면서 친지들과 옛정을 가꾸고 웰빙 음식과 걷기 운동으로 건강에 유념하고 있다. 칠순이 넘은 나이에 글쓰기를 시작해 자기성찰과 사색을 통해 정신적인 노쇠를 예방하는 한편 가끔이라도 영화관이나 음악회 전시회를 기웃거리고 있으니 문화의 문턱에 적어도 한 발을 들여놓은 기분이다.

꿈의 실현을 뒤늦게마나 깨닫는 지금 잊혀진 줄 알았던 꿈이 사실은 내 인생사 갈림길에서 어려운 선택을 도맡아 준 발자취를 보는 것 같아 놀라고 감격한다. 결국 꿈은 나의 사고방식 가치관 생활태도에 스며들어 내 생의 길잡이가 되었던 것인가. 일기장에 적었던 옛 메모가 오늘 내 영혼을 일깨워주는 계시적 교훈은 '꿈은 이뤄지라고 있는 것.' 그러니 어떻든 꿈은 꾸고 볼 일이다. 자기 눈높이에 맞는 꿈이면 이뤄질 확률은 100 퍼센트. 참으로 충만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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