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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마당] 사각지대의 앵무새

김영애 / 재미수필문학가협회 이사

동물원에 들어섰다. 뜨거운 햇볕 속 새장에 갇힌 초록 가슴의 빨간 머리 앵무새가 눈에 들어온다. 반복되는 일상에 지루했던지 앵무새는 지친 표정으로 새장 한 구석에서 졸고 있다. 아프리카 푸른 정글에서 밀림의 자유를 만끽하던 새가 무슨 인연으로 사막인 캘리포니아 동물원까지 온 것일까. 불현듯 일상의 내 모습과 다름없음에 내심 크게 놀란다. 쇠창살의 일정한 간격같이 반복되는 하루 속에 나의 영혼은 졸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새로움을 찾아 미국 땅에 온 지가 벌써 25년이 넘었으니 꽤나 세월이 흘렀다. 처음에는 한국의 조급한 생활 습관에 젖어 모두가 느긋하게 걷는 교차로조차 뛰며 건넜다. 먹이를 받아먹는 어린 앵무새마냥 버스를 기다리며 영어를 배웠다. 문법에 어긋나 어섯도 안 되는 영어로 옆의 사람에게 말을 건네면 얼굴조차 기억되지 않는 뚱뚱한 흑인 여자는 내 말이 답답했든지 아니면 영어를 배우려 애쓰는 것이 안쓰러웠든지 말끝마다 고쳐주며 얘기를 이어갔다. 어쩌다 만난 가슴 넉넉한 미국 할머니는 단어의 액센트까지 몇 번씩 반복시켰다. 까만 입의 앵무새가 부리 속의 둔한 혀를 굴리며 사람의 언어를 익히듯 나는 그렇게 영어를 익혀 갔다.

생동감 넘치는 싱싱한 김치와 눈부신 흰밥에 길들여진 나 언제부터인가 기름진 스테이크와 감자칩들은 나의 깊은 내부에 무언가를 꿈틀거리게 했다. 날 잡아 벼르고 별러 끓여낸 매운 김칫국에 하얀 밥을 말아 몇 주일이고 먹어본다. 더 이상 김치와 밥은 그냥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그것은 가슴에 맺힌 붉은 고춧빛 아쉬움이 진해져 생긴 끝없는 향수이다. 가슴에 줄기줄기 엉킨 그리움은 김칫국같이 걸쭉해서인지 먹어도 먹어도 풀리지가 않는다. 모든 빛을 수용한다는 하얀 빛깔의 쌀밥조차 넘쳐흐르는 강물 같은 향수의 한을 풀어내지 못한다.

20년이 넘어 고향 서울을 방문할 때의 기쁨은 강물이 바다를 만난 듯 무척이나 들떠서 걷잡을 수가 없었다. 고향 흙을 밟는다는 것은 기쁘다 못해 손끝에 들인 봉숭아물처럼 마음 한 모서리를 진한 설렘으로 물들였다.



가슴 속에 아늑하게 그려진 고향 땅에는 멀리 뒤켠 큰 산의 나무들이 눈부시게 파란 하늘 아래 꿋꿋하게 서 있고 그 앞으로 나지막한 야산들이 옹기종기 둥지를 틀고 있다. 그 옆에는 삐뚠 자로 그은 듯 작고 예쁜 초록 논밭들이 정답게 붙어 있다. 산등성이 아래 겸손하게 몸을 낮춘 초가집은 늙은 어머니의 모습같이 고즈넉하게 낡았지만 옛 모습 그대로 숨결처럼 자연스럽고 편안했다.

그러나 공항을 지나 차창 밖에 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아파트 단지들은 무슨 산맥이라고나 할까. 놀랄 만한 발전은 위압감을 느낄 정도였지만 그 높이만큼 커진 고독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어져야 할 그 무엇을 잃었던가 각진 모서리로 단절된 빌딩들은 휘청거리다 쏟아지는 빛 속에 어지럽게 흔들거렸다. 연둣빛 자연 속에 한가로워야 할 푸른 바람은 겹겹이 쌓여진 차가운 인조 불빛에 밀린 듯 왠지 모를 썰렁함으로 외롭게 떨고 있었다.

강나루의 낡은 배에 몸을 싣고 조개껍데기 문양의 물결을 이룬 강을 건너면 아늑하고 나지막하던 바람 숲이 서로의 뼈를 비비며 붉은 노을 아래 풍성한 하루를 마감했었다. 그 넉넉한 풍광이 모두 사라졌다. 평생 반쪽 몸을 물에 담그며 손님을 실어 나르던 낡은 나룻배의 삐걱삐걱 노 젓는 소리와 햇볕에 반짝이던 나루터의 가는 모래들 대신 그늘 하나 없이 벌거벗은 아파트들만 무섭게 줄지어 서 있는 것이다. 공룡 같은 빌딩들은 내 마음 속의 온갖 추억들을 가차 없이 몰아내었다.

작은 산의 심장을 도려내고 바람 길을 끊어 놓았다. 그리하여 온 산의 나무를 깎아내다 못해 마침내는 나의 추억까지 숨을 옥죄었다. 놀랍다 못한 실향의 허전함은 내 온몸을 흔들었다.

고향은 사는 사람들만의 몫인지 몸이 고향을 떠나면 고향은 매정하게도 떠나는 이를 버리나 보다. 변함없는 고향은 언제나 마음 깊은 곳에 소중히 간직되어 있는데 옛 고향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으니 기억하고 있음 자체가 한없이 바보스러워진다. 어쩌면 추억은 사람 흉내를 내는 앵무새 소리가 사라지면서 생기는 만질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소리의 여운인지도 모르겠다.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 추억어린 광화문 네거리에 다다랐을 때 거의 쓰러질 것 같은 현기증을 느꼈다. 그곳은 중.고등학교를 거치며 아침저녁으로 6년을 오갔던 정든 마음의 보금자리였다. 차마 수줍어 들여다보기만 하던 빵집도 신호등 네거리의 평화롭고 아늑했던 정취도 찾을 수 없었다. 셀 수 없이 많아진 차선과 수많은 지하철의 입.출구 일대가 마구 혼선으로 엉켜버린 것이다. 도무지 방향을 헤아릴 수가 없다. 광화문 모퉁이를 돌며 추억을 잃은 상실감에 나는 펑펑 소리 내어 울고 싶었다. 과거는 너무도 바쁜 현실에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어 잊어지지 않는 추억조차 슬프게 무너뜨리고 말았다. 찾아간 고향은 송두리째 도난당하고 허무하게도 실종됐다. 이제 나는 고향을 잃은 실향민의 신세가 되었다. 내 집 내 땅을 그렇게 헤매는 주인이 어디 있단 말인가. 바야흐로 고향에서조차 낯선 사람이니 나는 철저한 이방인이 아니고 무엇이더란 말인가. 이제 나에게는 고향도 타향도 없다. 나는 어디에서도 정체성이 실종된 생명체이다.

자동차 백미러에는 사각지대라는 것이 있다. 실제로는 존재하지만 거울에 비쳐지지 않아 실체가 보이지 않는 공간이다. 나의 기억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모든 실체가 사라진 까닭에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 머물고 있다. 안타깝게도 추억은 실체 없이 혼만 남은 그 무엇이 되어버린 것이다.

앵무새 장을 막 떠나려 하자 졸던 앵무새가 느닷없이 투박한 소리로 "아이 러브 유"라고 애교를 부린다. 앵무새의 사람 흉내가 내 영어 발음처럼 어설프고 서툴다. 밀림을 떠나 사막 캘리포니아의 까칠한 팜트리 아래에서 낯선 소리를 더듬는 앵무새와 고향을 떠나 모자란 영어로 살아가는 나와 다른 점이 무엇이란 말인가. 언어조차 완벽하지 못하고 한국말도 잊어가는 철저한 언어의 사각지대에 살고 있는 나는 돌아갈 곳을 잃은 실향민이다. 밀림을 떠나 언어가 다른 세상의 동물원에 갇혀 있는 앵무새 어찌 보면 사람의 언어와 새의 언어의 사각지대에 있는 앵무새가 바로 나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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