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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하나로는 집 못짓 듯 인생도 마찬 가지…바둑판에 담긴 열정 인생 박명하씨

"바둑은 냉정·온화하다 그래서 인생을 닮았다"

아버지 어깨너머 배워 '아마 5단'
세심하게 복기하며 인생 되짚어
돌을 이어가듯 관계를 잇는게 삶


오롯이 직선으로만 만든 세계가 있다.
각 선은 수평과 수직이라는 틀 아래 바짝 엎드려있다.

침묵 속에 서로를 가로지른 그들은 십자가와 작은 중점만을 남겨두고 미련없이 떠난다. 이내 점은 빛과 어둠으로 가려진다. 黑과 白. 둘 중 하나만이 점들을 지배할 수 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진검승부다.

바둑은 냉정하다. 살기 위해 포기하고, 죽이기 위해 타협한다. 한없이 외롭고 고통스런 싸움일 터. 천재 중의 천재라는 조훈현 9단은 "아직도 19로(路)의 비밀을 알지 못한다"라고 했고, 이창호 9단은 "그저 끝없이 먼길을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바둑은 온유하다. 이기려 하지 않고, 먼저 자신을 돌아보라 한다.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 같다. 그 오묘함에 빠져 한평생 바둑돌을 쥐고 산다는 박명하(75)씨는 바둑을 ‘연결’이라 정의했다. 사람과 사람, 바둑돌과 돌 사이를 잇는 작업이라는 것.

바둑판에서 인생을 배운다는 박씨는 “사람이나 돌이나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라며 “수많은 연결고리 속에 희로애락이 있고 추억이 있다”라고 말했다.

가로 세로 19줄, 점 361개, 경우의 수 무한대. 이 안에 인생이 있다.

#. 득호우(得好友·좋은 친구를 얻으라)

황토 빛 네모 반듯한 바둑판 위에 박명하씨가 흰 돌을 올린다. ‘탁’하고 내려놓는 소리가 없다. 거의 막바지라며 손이 기계처럼 움직인다. 검지와 중지로 살짝 집은 돌이 빈 구멍을 찾아다닌다. 아까 잡은 검은 돌도 쑥쑥 밀어넣는다. 속도가 너무 빨라 계산된 움직임인지 아닌지 알아챌 수가 없다. "이세돌이 따로 없네요”하니 “그분은 입신(9단)이고, 난 아마추어 5단”이라며 살짝 미소를 짓는다. 싫지 않은 눈치다. 그의 바둑은 일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어깨너머다. 이봉창 의사를 본받아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한 아버지는 도쿄에 자리를 잡고, 매일 밤 동지들과 바둑을 뒀다. 좁은 다다미 방에 둘러앉아 며칠 밤씩 새기도 했다. "아버지가 ‘한 수 배우겠습니다’하고 고개를 숙이면, 저는 바로 자리를 잡았어요. 다들 아무 말도 없는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딱딱 다음 수를 읽어내는 모습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어요. 그걸 아버지는 수담(手談)이라고 하셨죠.”

무조건 따라했다. 아버지와 같은 곳에 돌을 놓고 이리저리 옮겨봤다. 은연중에 마름모 모양이 많으면 이긴다는 것을 깨우쳤다. 덤으로 맨 바깥쪽에 집을 짓는 것이 쉽다는 것을 알게 됐다. 속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마자, 박씨는 한국땅을 밟았다. 아직도 갓 쓴 노인들이 사랑방에 자리를 깔고 바둑을 두던 시절, ‘우리 명하를 이기면 탁주 한 말 돌리겠다’는 아버지를 위해 열심히 바둑판을 누볐다. 아직 한국말이 서툴던 소년에게 바둑은 좋은 친구가 돼줬다. 차갑지만 보들보들한 촉감, 깨끗한 소리, 듣고있어도 계속 듣고 싶은 아버지의 칭찬…. 눈만 감으면 전 날 둔 바둑판이 그려졌다. 촘촘한 바둑판이 마음판에 박혔다.

#. 사소취대(捨小就大·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하라)

빈 바둑판을 중간에 두고 마주 않았다. "장기는 좀 둘 줄 아는데…"하고 말끝을 흐리자 빙그레 입가를 올리며 "못한다고 인정하는 것이 바둑의 시작"이라고 했다. 아무 말 없이 검은 돌을 내 쪽으로 쓱 민다. 뜬금없이 풋볼을 좋아하느냐고 묻는다. “풋볼과 같아요. 땅따먹기와 같은 원리죠."

어렵다. 판 위에 돌이 많아 질수록 혼란스럽다. 처음엔 십자(十) 한 개만 찾으면 한 집이라고 했는데, 십자가 이리저리 겹쳐지니 몇 집인지 알 수 없다. 복잡하다. 시간은 더디게 흐르고 손가락은 갈 곳을 잃었다. 젊은 시절, 그의 삶도 그러했다. 병환과 가난, 여러 번의 실패가 뒤따랐다. 공장, 학교, 기원, 제과점, 파라과이, 그리고 미국까지…. 잘 살고 싶은 만큼 열심히 뛰었지만 남은 건 빚뿐. 미안함, 괴로움, 막막함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바둑도 비즈니스도 다 머리싸움인데… 전 바둑하는 머리만 있었나 봐요(웃음). 항상 가족에겐 미안하죠. 그래도 빚은 모두 갚았어요. 꼼수 부리지않고 마지막 1달러까지요. 참 감사하죠.”

푸르스름한 아침에 나가서 어두컴컴해 질 때까지, 그는 하루에 일자리를 3번이나 옮겨다녔다. 시쳇말로 쓰리잡. 온 가족이 차 한 대로 움직일 때라, 아이들 픽업도 모두 그의 몫이었다. 이제야 편히 웃으며 추억할 수 있는 일이 됐지만 분명 괴로운 날도 있었다. 올해로 미국에 터를 잡은 지 22년째. 잃은 게 뭐냐는 질문에 “아, 솔직히 돈은 못 벌었어요. 생활이 확 핀 적도 없고요”라며 털어놓는 그의 주름이 깊다. 그러다가 이내 싱긋 미소를 짓는다. “그래도 얻은 게 더 많네요. 바둑학과 교수 직함도 받았고요(웃음). 사실 전 대학 근처에도 못 가봤거든요.” 돈보다는 웃을 수 있는 여유를 택했다.

#. 공피고아(功彼顧我·상대를 공격할 땐 먼저 나를 돌아보라)

어지러운 바둑판을 쓱 훑어보는 눈빛이 매섭다. 반면 손가락은 참 여유롭다. 허공에서 헤매지 않고 소리없이 빈틈을 노린다. 다리를 꼬는 법도 없다. 이따금 보청기를 조절하는 것만 빼면 신성한 무언가를 마주한 듯하다. "승부조작이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말이죠. 바둑판은 참 투명해요. 누가 치수를 속이는지, 누가 생각 없이 두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거든요." 무리수를 두지 않는다는 건 오랜 신념이다.

그의 바둑 성향은 보수다. ‘커피내기’를 금할 만큼 극우는 아니지만 (바둑을) 게임이 아닌, 인격수양이나 철학으로 바라보는 수구파다. 술·담배·속임수·돈내기·막말을 바둑판에서 쓸어버리고픈 순수파이기도 하다. 축 쳐진 눈초리와 잦은 웃음으로 가려져 있지만 그는 예민하다. 또 같은 질문을 여러 번 되묻는 것으로 보아, 끈질기고 신중한 사람이다. 잠시 아무 말이 없는 틈엔 자신의 말을 곱씹어보고 있다.

"예전에 파라과이에서 한 독일 기사와 대국을 한 적이 있어요. 사실 좀 우습게 봤죠(웃음). 결과요? 1승2패로 졌어요. 알고 보니 상대는 유럽 바둑챔피언이었던 거죠. 분수를 몰라 당한 거예요."

하루에도 몇 번씩 그는 자신이 둔 수를 모두 뒤집어 엎는다. 흩어진 돌로 자신이 둔 바둑을 처음부터 다시 놓아본다. 순서를 잊어버린 적은 아직 한 번도 없다. 머릿속으론 ‘왜’를 수없이 외친다. 그렇게 지금껏 아픔도, 괴로움도 되짚어왔다. 돌아본 그곳엔 언제나 답이 있었다.

#. 동수상응(動須相應·상대의 움직임과 궤를 같이하라)

왼손은 ‘월간바둑’을, 오른손은 아내의 손을 잡고 있다. 인터뷰 전부터 "내 바둑을 알려면 우리 집사람을 만나봐야 한다"고 강조했던 터다. 결혼한 지 44년째. 두 사람은 서로 가장 친한 친구라고 소개했다. 처음부터 바둑두는 남편이 좋았느냐고 묻자, "처음부터 바둑 두는 사람인 줄 알았으면 결혼 안 했죠"하며 너스레를 떤다. 지금도 밤을 새며 두는 바둑은 싫다고 한다. "지금은 이해해요. 남편은 ‘하늘 수’를 두고 있어요. 저는 성경으로, 이 사람은 바둑으로 인내, 정직, 성실, 용서 같은 것들을 깨닫는 거예요. 이젠 ‘바둑이’와 산책간다고 하면 왠지 안심이 돼요. 믿으니까요."
믿음을 담보 잡힌 그의 바둑은 끈끈하다. 한 수 한 수 두면서 만난 친구도 여러 명. 그 인연을 이어가기 위해 애쓴다. 혼자서는 지금까지 올 수 없었을 거란 말도 덧붙인다. "바둑판에서는 돌 하나로 집 못 지어요. 그건 인생도 마찬가지죠."

항상 궁금했다. 왜 널찍한 네모 칸을 두고 작은 점 위에 돌을 올리는 걸까. 어쩌면 바둑을 처음 만든 사람도 '잇다'라는 행동에 의미를 둔 것일지도 모른다. 네모 칸에 돌을 올리면 돌은 틀에 갇힌다. 끼어들 틈이 없다. 벽을 두고 이어지는 것은 소통이 아니다.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빈 바둑판을 마주한다. 점과 점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마음 다해 엮어본다.

구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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