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 마당] 풍류를 위한 나들이
박유선/월간 '수필문학' 등단
시애틀은 매달 첫 번째 목요일에 무료로 양대 박물관과 식물원 유명 화랑이 미술 애호가들을 위해 저녁 8시까지 문을 여는 문화도시다.
우리는 주차장 찾기도 귀찮아서 공용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버스를 타기로 했다. 때로 다운타운에 나갔다가 퇴근시간에 맞물리면 고속도로가 어찌나 붐비는지 지난 날 내가 어떻게 20년 넘게 날마다 차로 다녔던가 싶다. 다운타운에서 일할 때 어떤 손님이 다운타운에 1년 만에 왔다고 하면 난 속으로 의아해 했다. 그런데 이제 내가 그 짝이 났지 싶다.
버스 번호를 몰라 기사에게 물어보니 마침 자기가 그 버스를 교대 운전할 것이니 여기서 기다리라고 한다. 정말 오래간 만에 버스를 탔다. 우리 뒤를 이어서 휠체어 탄 사람이 버스에 오르니 운전기사는 친절히 도와준다.
그런데 예전에 기회가 있을 때 어쩌다 내가 책을 읽거나 바깥 구경 하느라 일부러 버스를 탔을 때는 말끔한 신사 숙녀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오늘 버스 안 분위기는 영 아니다. 거의 다라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사람들 차림새가 꾀죄죄한데다 냄새까지 나니 아마 할 일없는 사람들이 시간 죽이기로 타는 때인가 싶다. 노숙자인 듯한 한 남자는 새 것인 듯싶은 텐트와 램프를 몇 번이나 집어 매만져 보고 또 보곤 한다. 저 사람 목적지는 어디일까? 어쩌면 저 사람에겐 저것이 재산의 전부가 아닐까 하는 값싼 연민이 인다.
시애틀 현대 박물관 관람객들의 분위기는 조금 전 버스 안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우선 사람들 얼굴엔 느긋함과 평화가 깃들어 보인다. 바깥 세상에서 보다 한 박자 느린 걸음으로 미술품을 감상하는 모습이 얼마나 여유롭고 즐거워 보이던지 그들 삶의 한 단면을 보는 듯싶다. 그래서 나도 시간만 있으면 박물관으로 달려 가는 것같다.
그날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후기 인상파들의 명화들을 특별 전시하고 있어 그 부분만큼은 관람료를 내야 했다. 그러지 않아 예술작품을 특히 사랑하는 우리는 시간이 없어서 벼르다가 잡은 날인데 사람들이 예상외로 참 많다. 예술을 아끼는 사람들이 사는 도시가 바로 시애틀이라더니 정말 그런 것같다. 전시장에는 작품 역시 생각보다 많이 진열되어 있다.
명화란 눈보다도 먼저 마음을 끈다더니 정말 그곳에는 에드가 드가의 아주 흐리게 스케치한 작품이 있는가 하면 좋아하는 크라우드 모네의 특징적으로 섬세한 아름다움이 배인 정물과 연꽃 그리고 1871년에 그렸다는 풍차 이외에 다수가 보인다. 또한 르느와르 역시 내가 좋아하는 화가인데 그의 그림의 특징은 인물화 그 중에도 특히 어린이와 여인이 주를 이룬다. 또한 여인의 누드화가 여러 점 선보이는데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이 함께 녹아 들어 예술미를 뿜어내는 것이 바로 예술의 힘인가 싶다. 세잔의 정물화도 정말 섬세하고 아름답다.
그런데 그보다 고야의 유화 여섯 마리의 배가 붉은 도미를 얼기설기 척척 쌓아놓은 모습이 퍽 인상적이다. '여섯 마리의 생선'은 정말이지 뱃전에서 막 건져올린 듯 파닥거리며 비린내를 풍기는 것 같다. 특히 아직 살아 있는 듯한 어안이 어찌나 투명하던지 그만 그림에 매료되어 시간가는 줄 모르고 홀딱 빠져 버린 어느 오후였다.
나는 일일이 작품에 말을 걸어 보았다. 그렇게 자세히 다 보고서도 언제 내가 이런 좋은 명화를 또 보겠나 싶어 또 다시 한바퀴 돌며 찬찬히 보고 밖에 나오니 어느새 저녁 때가 되었다.
우리는 박물관 앞 화랑에 들어가 전시된 화려하면서도 아름다운 현대화를 한참 즐겼다. 그러다 옛날 우리가 갤러리를 오랫동안 하던 파이어니어 스퀘어까지 걸어가 가끔 가던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또 다른 갤러리 한 두어 군데 더 보곤 지쳐서 그냥 집으로 오는 버스를 간신히 찾아 탔다.
예전에는 하루에 아시아 박물관과 현대 박물관 그리고 갤러리를 섭렵하고 다녔는데 이젠 건강이 여의치 않아서 그런지 예전 같은 열정이 없다. 그러나 정신만큼은 어쩌면 더 여유롭고 노련미가 우러나 인생의 더 깊은 곳 보이지 않던 데까지 관조하게 되는 것 같다. 결국 인생이란 나이를 먹는 것이 나쁜 것만이 아닐 뿐더러 연륜에서 묻어나오는 삶의 지혜를 차곡차곡 쌓아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쩌면 내 생전에 단 한번도 마주치지 못할 수도 있었을 일. 사랑스러운 명화들과 조우하고 풍류를 넉넉히 즐긴 행복한 어느 오후 시간을 허락하신 나의 신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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