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맛과 멋] 놋그릇이 그리운 계절
이영주/수필가
놋그릇은 일명 ‘유기(鍮器)’라고 불린다. 사전적 의미로는 ‘구리에 주석을 섞어 만든 청동기’다. 제작 기법에 따라 안성의 ‘주물유기’, 평북 정주군 납청에서 전해진 ‘방짜(方字)유기’, 주물과 방짜를 병행한 순천의 ‘반방짜유기’ 등으로 분류된다. 이중 으뜸은 방짜유기다. 망치로 두들기고 펴서 모양을 만드는 제작 과정이 가장 까다롭기 때문이다. 일곱 명이 한 조가 되어서 메고, 치고, 두들겨 모양을 만드는데, 그 과정이 여덟 단계라고 한다. 하루 종일 그 복잡한 과정을 거쳐 힘들게 만들어지는 그릇이 겨우 6개라니 그 수고를 추측할 수 있다. 스님들이 삭발할 때 쓰는 삭도도 방짜, 김덕수 사물놀이패가 사용하는 꽹과리, 징도 바로 이 방짜다.
유기는 기원전 청동기 시대부터 무구(武具)나 제기(祭器)로 사용되기 시작해서 고려시대에 상류층 생활용품으로 확장되었고, 조선시대에 생산이 확대되면서 중산층 가정에서도 생활용품화 되었다. 주발, 대접, 수저 같은 부엌세간이나 제기들과 대야, 요강과 같은 혼수품, 꽹과리 징 등의 악기, 절이나 무당집에서 쓰던 촛대, 좌종, 바라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사용되었다. 그래서 옛날에는 놋그릇의 질과 양, 관리 상태가 그 집안의 생활 정도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기도 했다.
안성은 1600년대 초반에 이미 유기 제작을 업으로 하는 마을로 형성됐을 만큼 유기 산업이 발달했고, 1700년대 중반에는 나라가 인정하는 유기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주로 식기로 쓰였던 안성유기는 다른 지방의 식기보다 아담하고 마지막 마무리를 잘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안성맞춤'이다.
해방 이후 연탄가스에 변색되기 쉽다는 등의 이유로 갈수록 좁아져온 유기의 입지가 최근 들어 부활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살균기능, 농약성분 검출기능 등, 놋그릇의 살균 효과가 입증되면서 이른바 ‘생명의 그릇’으로 재조명받고 있는 것이다. 이젠 웬만한 사람은 선뜻 손이 가기 어려울 정도로 가격도 만만치 않다.
나에게 놋그릇은 시집살이를 떠올리는 못된 물건이었다. 명절과 제사 때마다 제기와 그릇들을 닦아야 했기 때문이다. 짚에 양잿물을 묻혀 광이 날 때까지 닦아야 했는데, 그 많은 그릇들을 닦으려면 팔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힘들었다. 시어머니는 그런 힘든 일을 일하는 사람 다 놔두고 꼭 내게 시키셨다.
내가 유기에 대해 이렇게 아는 척 할 수 있는 것은 지난 여름 ‘대구 방짜박물관’에 다녀왔기 때문이다. 이 박물관은 중요무형문화재인 유기장 이봉주 옹(翁)이 평생 제작하고 수집한 방짜유기 270여 종, 1400여 점을 대구시에 무상 기증하면서 세워졌다. 방짜유기의 본고장인 평북 정주군 납청 출신인 이옹은 문경 가은읍에 유기촌을 세워 제자 5명과 함께 지금도 손을 쉬지 않고 있는 분이다. (세상이 어찌 변하든 자신의 길을 올곧게 지키는 이런 장인들이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든든하다.) 드라마 ‘대장금’의 임금님 밥상에 나왔던 그릇들, 부시 대통령 방한 때 사용했던 그릇들이 모두 이옹의 작품이다.
집안에서 그릇이나 제기 등만 보아온 내게 다채로운 악기, 제기, 식기 등의 전시물은 일종의 문화 충격이었다. 작품들은 품위 있고, 아름답고, 그 자체가 예술이었다. 하지만 나는 유기 예술의 진수를 체험하면서 이옹의 수저만 두 벌 달랑 샀다. 칠첩반상 정도는 사고 싶었지만 워낙 고가인지라 이옹의 수저와 아드님이 제작했다는 주걱, 국자로 만족해야 했다. 새삼 우리 문화의 그 무궁무진한 다양함과 깊이에 경탄한다. 젊은 시절 내가 그렇게도 싫어했던 놋그릇을 사지 못해 안달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놋그릇을 떠올린 나는 부지런히 된장국을 끓이고 굴비 한 마리를 구워 밥상을 차렸다. 놋주걱으로 밥을 푸고, 놋국자로 국을 떴다. 그 묵직함의 여운 탓인지 밥과 국이 더 따뜻하고 굴비 맛도 더 입에 감친다. 다음에는 기필코 이봉주옹의 방짜 칠첩반상을 사고야 말리라. 유기 수저를 놀리면서 새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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