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그의 인생 솥에선 전통이 끓고있다…'영동설렁탕' 최호빈 대표

그는 그가 끓이는 맑은 국물만큼이나 담백한 사람이다. 인터뷰 약속시간에 찾아갔더니 먼지를 뒤집어 쓰면서 식당 천장의 형광등을 갈고 있었다. 그의 첫마디는 "뭐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인터뷰를 해?"였다. 뚝배기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맑은 설렁탕으로 잘 알려진 '영동설렁탕'의 대표 최호빈(59) 사장이다. 그는 좀처럼 언론에서 볼 수 없는 사람이다. "고작 설렁탕집 주인"이고 "말주변이 없어서"가 이유다. 하지만 19년간 끓여온 노하우는 주저없고 간결했다. "무던히 속을 끓여봐야 인생의 진국이 나온다"고 했다.

속 끓다
막노동하며 일궈낸 터전
LA 폭동 한순간 잿더미로
손님 끓다
한국서 찾은 말끔한 설렁탕
육수 비결 위해 파격 투자도
정성끓다
고기만 넣어 16시간 끊인 진국


LA 대표하는 '맑은 국' 되길


#속을 끓이다

최 사장의 끓이는 일은 '속 끓는 사연'으로 시작된다. 그는 1992년 4월29일 터진 LA폭동의 피해자다. 당시 운영하던 '다전국수'가 한순간 잿더미가 됐다. 82년 이민와서 막노동에 청소일까지 해가며 고생 고생 일군 알토란 같은 터전이었다. 국수집 월매출이 5만 달러가 넘었다. 돈도 돈이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해 댄 퀘일 부통령 등 유명인사들이 즐겨 찾아 '맛집'의 명성까지 얻었던 곳이다.

"라디오 뉴스에서 내 가게가 불 타고 있다고 하더라고. 내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었어. 위험하다고 다들 말렸지만 쫓아갔지. 불길은 치솟는데 쳐다만 봐야하니…. 생각하기도 싫은 악몽이야."

삶이 무너졌는데 다시 일어설 일은 까마득했다. 보험이 없어 보상금을 받지 못했고 한국에서 동포 지원금으로 받은 3000달러가 고작이었다.

어렵게 은행 융자를 얻어 지금의 영동 설렁탕 자리에 다시 국수집을 열었다. 하지만 운이 따르지 않았다. 가게 코 앞 윌셔와 웨스턴 코너에 지하철 공사가 시작됐다. 1주일에 나흘은 진입로가 막혔다. 그의 속은 끓다 못해 새까맣게 탔다.

"하루에 고작 국수 한 그릇 파는 날도 있었어. 얼마나 답답했는지.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지."

돌파구가 필요했다. 잠시 식당을 접고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손님이 끓다

한국에 갔지만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끓는 속을 삭히려 술을 마셨고 다음날 속 풀기 위해 찾아간 식당에서 그는 해답을 찾았다. 신사동의 영동설렁탕이다.

-왜 설렁탕인가.

"설렁탕인데 국물이 뿌옇지 않고 맑았다. 쓰린 속 달래는데 최고였다. 당시 LA 설렁탕집은 죄다 뿌연 국물이었다. 이걸 해보자 싶었다."

두 달간 식당의 허드렛일을 도우면서 육수 내는 법을 배웠다. 미국에 돌아와서 다전국수 간판을 내리고 영동설렁탕을 내걸었다. 폭동 1년이 지난 1993년이었다.

배웠어도 육수 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어설프게 하다가 안 되겠다 싶어 한국에서 주방장을 데리고 왔다. 영주권에 아파트 렌트비까지 주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육수 하나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육수가 어떻게 다른가.

"우린 사골 같은 뼈를 쓰지 않는다. 오로지 고기만으로 육수를 낸다. 양념도 없다. 5~6가지 부위별 고기를 넣고 푹 끓인다. 어떤 부위 고기를 얼마나 넣느냐에 따라 국물 맛의 미묘한 차이가 갈린다. 단시간에 배울 수 있는 맛이 아니다."

석 달 간 국물에만 매달렸다. 알고 지내던 탤런트 조경환씨가 광고에 출연해 선전을 도왔지만 맛은 빨리 찾아오지 않았다.

"나는 '면 출신'이지 '국 출신'이 아니잖아. 그러니 시간이 걸릴 수밖에. 몸으로 배우는 것 말고 방법이 없었지."

어느 정도 맛이 손에 익자 식당이 붐비기 시작했다. 속을 끓이던 식당에 사람이 끓었다. 폭동의 잿더미에서 주저앉은 지 꼭 3년 만이었다.

#정성을 끓이다

그리고 18년이 지났다. 그렇게나 안달하며 끓였던 육수 내는 일은 이제 자연스러워졌다. 맛을 보지 않고도 맛을 알 정도다. 국물 색과 투명도만 보면 안다고 했다.

-끓인다는 의미는.

"인생 자체가 끓이는 과정이다. 사는 게 어디 쉬운가. 게다가 타향 이민생활은 몇 배는 더 어렵다. 살면서 속 끓이는 일이 없으면 깊은 맛은 나오지 않는다."

-하루 몇 시간을 끓이나.

"문 열고 닫을 때까지 16시간을 줄곧 끓인다."

-맛의 비결은.

"투자와 정성이다. 우리집 육수는 고기만 넣고 끓이기 때문에 재료비가 많이 들어간다. 사골은 파운드에 몇십 센트면 되지만 고기는 파운드에 2달러 이상 줘야한다. 또 손도 많이 간다. 국통 위로 뜨는 기름을 계속 걷어내면서 끓여야 한다."

끓이는 데 익숙해지는 동안 그는 안주하지 않았다. 10년 전 길 건너에 '하이트 광장'이라는 생맥주집을 열었다. 시원한 맥주 한잔 할까 싶어도 갈 곳이 마땅치 않다는 '단순한 생각'에서였다.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첫 달부터 장사가 잘 됐다.

4년 전에는 오렌지카운티 상가 건물도 샀다. 그 건물에 LA 영동설렁탕 2호점을 냈다. 불황이지만 건물 융자 모기지를 갚는 데는 문제가 없을 정도로 2호점도 선전하고 있다. 최종 목표는 지점 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다. 그의 설렁탕이 LA를 대표하는 '맑은 국'으로 인정받길 바란다. 오래오래 혀끝으로 기억되는 맛이 그의 진정한 꿈이다.

지금 그의 인생 솥에는 전통이 끓고 있다.

글·사진=정구현 기자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