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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고통 뒤에 온다…랜디 김의 행복만들기

그 패배들은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더 이상 맞는 게 두려웠다. 두들겨 맞다가 펀치 한방에 '쿵' 하고 쓰러져서 링 바닥에 쓰러지면 관중의 함성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일어나야겠다고 마음 먹지만 몸은 전혀 말을 듣지 않는다. 패배 또 패배. 4번을 계속 졌다. 정말 처참하고 약한 나 자신이 싫어지더라. 하지만 그 패배들은 내 인생의 방향을 바꿔 나가는 계기가 됐다. 내 인생의 행복만들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나는 한국 최고의 육상 투포환 선수였다. 한국신기록을 6번이나 갈아치웠다. 한국 육상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으니 어딜 가도 대접을 받았다. 항상 '내가 최고'라는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비인기 종목'의 선수라는 설움은 가시지 않았다.

2006년 어느날 내 앞에 이종격투기 K-1 계약서가 들어왔다. 당시 K-1은 일본 최고의 이종격투기 대회였다. K-1의 평균 시청률이 15~20%였고 평균 관중만 5만 명이 넘었다. 투포환선수로서 내가 받던 연봉은 8000만원. K-1선수로 받은 계약금이 연봉보다 더 많았다. 명예와 돈이 한꺼번에 올 것 같았다. 행복했다.

하지만 난 싸움꾼이 아니었다. 6개월동안 연습을 하고 첫 시합에 나갔다.



상대는 모리 아키오였다. '무사시'라고 더 잘알려진 그는 당시 일본 최고의 이종격투기 선수였다. 링 위에 올라 그를 쳐다보니 숨을 쉴 수도 없었다. 무서웠다. 나는 그날 KO패를 당했다.

사람들이 자주 묻는다. 긴장하면 맞아도 안 아프지 않냐고. 그런데 정말 죽을 것 같다. 그렇게 맞으면서 1라운드(3분)만 버텨도 정말 속에서 단내가 나고 숨이 멎을 정도다.

4경기 연패(3번 연속 KO패 1번 판정패)를 하니까 이건 도저히 '내가 할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은 한 선수에게 로킥(Low Kick)을 하도 맞아서 오른쪽 다리가 멍으로 시커멓게 변한적도 있었다.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줄 알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게다가 TV로 중계된 경기라 길거리를 지나면 많은 사람이 알아봤다. 어디 땅 구멍이라도 파고 숨고 싶었다.

무조건 '1승'은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진짜 이를 악물었다. 예전의 명성도 명예도 돈도 모두 버렸다. 그러니 내가 얼마나 교만했는지가 보이더라. 그리고 '조쉬 바넷'이라는 격투기 선수 밑에서 1년간 미친 듯이 운동만 했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2008년 K-1 하와이 대회에서 부상 선수가 생기면 대신 출전하는 '땜방선수' 자격으로 참가하게 됐다. 그 대회에서 나는 결승까지 올라 준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결승에서는 K-1 최고의 선수였던 '구칸 사키(터키)'와 붙었다가 KO로 졌지만 그때 링 바닥 쓰러진 기분은 이전과 너무 달랐다. 얼굴은 피멍이 들고 두 눈은 부어서 제대로 떠지지 않았지만 링 바닥에 쓰러져 한참을 웃었다. 그리고 마음껏 기쁨의 눈물도 흘렸다. 비록 결승에서는 졌지만 그렇게 고대하던 '1승'을 거뒀기 때문이다. 정말 행복한 KO패였다.

내 인생의 행복관도 바뀌었다. 고통 뒤에는 반드시 행복이 있다. 이제 나는 '두려움' 따위에 절대 지지 않는다. 그런 자신감을 가지고 체육관도 오픈했다.

우리 체육관에는 의사부터 변호사 회사원 가정주부 등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다 온다. 그들과 함께 땀 흘리고 운동하는 것이 즐겁다. 지금 이 순간 나는 행복하다.

장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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