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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는 ‘음악의 파라다이스’입니다"

센트럴파크서 콘서트 연 테너 안드레아 보첼리

b>“신에게 노래하는 목소리가 있다면, 안드레아 보첼리처럼 들릴 것이다.” -셀린 디옹-

“안드레아의 노래를 들으면, 눈물이 쏟아지고 만다.” -오프라 윈프리-



감미로운 목소리의 스타 테너 안드레아 보첼리(52·사진)가 15일 센트럴파크에서 기념비적인 콘서트를 열었다. 보첼리는 앨런 길버트가 지휘하는 뉴욕필하모닉과 영혼의 깊은 우물에서 길러낸 천상의 노래를 선사했다. 무대엔 팝가수 셀린 디옹, 토니 베넷, 바리톤 브린 터플, 재즈 트럼펫주자 크리스 보티 등 음악 친구들이 무대에 올랐다.



보첼리는 센트럴파크 콘서트를 앞둔 13일 링컨센터 내 월터리드시어터에서 뉴욕타임스의 로빈 포그레빈 기자와 공개 인터뷰를 열었다. 이 자리엔 베로니카 베르티, 둘째 아들 마테오, 어머니 에디 보첼리가 참석했다.



-아버지의 꿈이 당신이 미국에서, 특히 뉴욕에서 공연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실현하게 된 소감은.

“센트럴파크처럼 큰 무대에서 공연하게될 줄은 몰랐다. 특히 셀린 디온, 토니 버넷, 브린 터플, 데이빗 포스터 등 재능있는 아티스트들과 공연하게 되어 기쁘다. 아버지가 살아계셔서 이 콘서트를 보신다면 정말 좋아하실 것이다. 내가 지금 이 자리까지 온 것은 나 혼자서 이룬 것이 아니다. 신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늘 뉴욕필과 에버리피셔홀에서 세시간 리허설을 했다. 야외 무대의 리허설은 다를텐데, 어떻게 준비하나.

“준비는 어디서도 항상 같다. 항상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미국인, 뉴요커들은 내게 항상 존중해줘서 무척 특별하다. 이번 콘서트를 CD와 DVD 덕에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길 수 있게 되어 기쁘다. 콘서트에서 신곡 5곡을 부를 것이다. 콘서트 준비하면서 사실 희생도 했다. 이탈리아에서 8월은 바캉스가 아닌가! 그런데, 콘서트를 앞두고 한달간 파스타도 와인도 포기해야했다(하하!) 난 이탈리안인데(하하!) LA에 와있던 아들이 날 보더니 ‘아빠, 날씬해 보이는 걸!’하더라. 그래서 ‘OK! 좋아1’라고 했다.”

-오페라가 첫사랑이라고 했다. 지금 오페라는 당신에게 무엇인가.

“어렸을 때부터 학교, 교회, 가정에서 누군가는 노래를 해야 했다. 사람들이 노래를 종종 시켰다. 어떤 때는 친구들과 공놀이를 한 후 피곤한데도 노래를 하라고 했다. 오페라의 큰 볼륨, 아름다운 억양, 깊은 표현력을 좋아한다.”

-젊어서 비틀즈와 스티비 원더의 노래를 즐겼다던데.

“난 20대에 늦게 팝송을 발견했다. 대학시절 피아노바에서 노래하면서는 오페라를 부를 수 없었다. 그래서 팝을 듣게 됐고, 재미있었다. 팝을 알게된 것은 새 언어를 배우는 기분이었다. 그때 내가 오페라를 노래하면, 친구들은 ‘왜 그렇게 소리를 마구 지르냐? 그만해!’라 놀리곤 했다.”

-미 TV 미니시리즈 ‘소프라노’에, 파스타 광고 ‘바릴라’에도 노래가 쓰였다. 대중문화 속에 등장하는 자신에 대한 생각은.

“내 레코드와 목소리가 너무 여러 곳에서 나오니까 나부터 점점 지겨워졌다. 사람들이 ‘이젠 그만해, 그만해!’하는 것 같다!”



변호사 길 걷다가 성악가로

오는 22일이면 보첼리는 53세가 된다. 약혼녀 베로니카 베르티와 사이에 아기도 곧 태어날 예정이다. 그리고, 2000년 아버지에게 바쳤던 자서전 ‘침묵의 음악(The Music of Silence)’ 개정판이 이달 말에 출간된다.

-어려서 울다가도 클래식음악만 들으면 그쳤다던데.

“6개월 때였을 것이다. 운명이었나 보다.”

-음악적인 가족이었나.

“우리 아버지는 음치였다. 내게 화가 나셨을 땐 목소리가 무척 크셨지만! 음치셨다. 어머니 쪽은 프로는 아니지만 뮤지션들이 있다. 아마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 같다. 여덟살 때 피아노를 시작했는데, 난 게을렀고 그리 잘 하지는 못했다. 스무살 땐 제법 모든 곡을 칠 수 있었다. 노래는 늦게 시작하게 됐다. 난 노래는 재능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 공부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못했다. 음악 코치를 만난 후에야 알게 됐다. 첫 선생님이 ‘넌 아름다운 목소리를 갖고 있는데, 정 반대 기법으로 노래를 한다’고 말했다.”

-피사대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1년간 변호사로도 일했다. 어떻게 가수가 됐나.

“노래가 아니고선 아무도 변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도 변호하지 않는 것이 낫다. 나도 모른다. 기본적으로 인생은 이상한 모험의 연속이며, 아무도 미래를 모른다. 난 미래에 대해 알고 싶어하지 않았으며, 내게 일어나는 일들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전설적인 테너 프랑코 코렐리의 문하생이었다.

“우리 집 가정부가 ‘프랑코 코렐리, 라 스칼라, 모든 이를 놀라게하다’는 신문을 보여주면서 나에게 ‘무척 미남이니 만나보라’고 했다(!) 그래서 만나게 됐는데, 보자 마자 반했다. 그에게 개인적으로 배우면서 그를 모방했다. 그의 목소리는 정말 감동적이었다. 하루 종일 배우고, 저녁식사에도 초대해 한밤중까지 노래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참 슬픈 일은 내가 유명해지면서 함께 다니면 사람들이 나를 ‘마에스트로’라 부르며 사인을 요청했다. 나의 마에스트로는 사실 프랑코인데, 나는 정말 당황했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닌데… 그후로 그에게 더 이상 배울 수가 없었다.”

-오페라가 쇠퇴하는 예술인가.

“그렇지 않다. 사실 극장은 항상 청중으로 가득 차 있다. 이탈리아에선 정기 티켓을 구하려면, 누군가 죽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말까지 있다. 오페라 극장의 좌석은 스포츠경기나 록콘서트가 열리는 스타디움보다 적은 2000여명 내외다. 그리고, 오페라는 TV에 잘 맞지 않는 예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층은 오페라를 좋아하고 있다. 왜냐면 오페라는 ‘음악의 파라다이스’이기 때문이다.”

-파바로티가 추천해서 이탈리아 록스타 주커로와 공연하면서 유명해졌다. 교황 앞에서 빌 클린턴 앞에서도 노래했다. 명성이란 무엇일까.

“명성이란 참 이상한 것이다. 우연하게 시작된다. 처음에 명성이 오면, 호기심도 생기고 흥미있다. 이후엔 습관이 되며 무언가를 주지만, 한편으론 사생활을 빼앗아 간다. 한 무명의 시골청년이 ‘안드레아’가 되어 곳곳에서 사인과 악수를 요청받게 됐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일관되게 애정의 센스를 느끼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7천만장 앨범 판매, 빌보드 톱 10에 앨범 5개 랭크, 그래미상과 골든글로브상 수상…등 많은 것을 성취했다. 무엇이 남았나.

“내가 꿈꾼 것 이상으로 이루어졌다. 또, 더 이상 이기고 싶은 게 없어서 좋기는 하다. 가수라는 행운의 직업인으로서 정말 중요한 것은 좋은 기억을 남기는 것이다. 우리 애들에게도 말한다. 항상 최선을 다하라. 말로만 해서는 안되므로, 행동으로 보여주려고 한다.”

정리=박숙희 문화전문기자 sukie@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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