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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30년 제 모든 것을 보여드립니다"

프랑스문화원 후원 개인전 여는 화가 변종곤씨

1970년대 중반, 대구의 한 미술교사는 단발머리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다가 장발 단속반에 수 차례 잡혀갔다. 1978년, 그는 철수한 미군 비행장을 극사실주의로 그려 제 1회 동아일보 미술대전 대상을 수상한다. 미국에 의해 좌우된 대한민국의 비극을 담은 작품으로 그는 곧 화단의 스타가 된다.

제 5공화국 출범 후 그의 이름은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어느 날 ‘빨리 움직이라’는 전화 한 통을 받은 그는 거의 야반도주 하다시피 뉴욕행 비행기에 오른다. 1981년 9월 붓과 물감, 1인용 산요 전기밥통을 등산용 배낭에 맨 그는 JFK공항에 도착했다.

미국으로 정치적인 망명, 할렘에서 죽음을 무릅쓴 생활, 생선가게에서 만난 화랑 주인, 상류사회 백인여성과의 결혼, 그리고 이혼… 화가 변종곤(63)씨는 뉴욕의 극빈자에서 최상류층까지 오가며 소설처럼 드라마틱한 인생의 파고를 고고하게 헤쳐왔다.

변씨가 뉴욕이민 30년을 결산하는 개인전을 연다. 내달 17일부터 11월 6일까지 브루클린 보름힐의 ‘인비지블독 아트센터(The Invisible Dog Art Center, 51 Bergen St.)’에서 ‘아파트 #1L의 레이어(A Layer of The #1L)’를 주제로 100여점을 전시할 예정이다. 이 전시는 프랑스문화원이 주관하는 2011 가을축제 ‘크로싱더라인(Crossing The Line)’의 한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전시 중엔 마리 로시에 감독이 만든 변씨의 다큐멘터리 ‘변, 발견된 오브제(Byun, Object Trouve)’도 상영된다.

브루클린 보름힐에 있는 그의 집과 스튜디오는 벼룩시장과 골동품가게에서 모은 수집품들로 가득하다. ‘변종곤의 우주’이자 ‘미니 박물관’인 이곳은 한국의 미술 관계자들이 뉴욕에 오면 반드시 방문해야할 명소로 알려져있다. 22일 모나리자와 마릴린 먼로, 최후의 만찬과 누운 부처상, 벌거벗은 인형과 우디 앨런, 그리고 해골과 각시탈이 공존하는 스튜디오에서 변씨를 만났다.

◆ 내 생애 최고의 전시
-이 전시가 왜 특별한가.

“내 인생 최고의 전시다. 뮤지엄처럼 정리된 공간에서 학예사들이 요구하는 뮤지엄 품위에 맞는 전시보다 ‘인비지블독’처럼 시간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인더스트리얼 공간에서 하는 것이 내겐 훨씬 잘 맞는다. 내가 가장 평소에 꿈꾸어오던, 자유롭게 나의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곳이다. 내가 가장 아껴온 인디언 그림 ‘굿모닝 아메리카’를 비롯, 바이올린첼로 작품 5∼6점 그리고 신작까지 내 뉴욕인생 30년이 모두 담긴 100여점이 전시될 것이다.”

-전시될 대작 ‘굿모닝 아메리카’에 특히 애착이 가는 이유는.

“샤넬의 회장이 찾아와 사겠다고도 했는데도 안팔았다. 예전에 한달 동안 자동차로 뉴멕시코, 애리조나, 유타 등 사막만 돌아다녔는데, 너무 아름다워서 죽고 싶었다. 거기서 인디언 원주민들을 만나서 며칠 합숙도 하면서 그들을 알게됐다. 미국인들은 사막에 카지노를 만들어 원주민 종족간에 이간질했다. 아웃사이더들인 인디언은 나의 모습과도 같았다. 분노한 얼굴이었지만, 내게 대하는 순수한 마음을 봤다. 내가 미국에 와서 침략자들보다 원주민들에게 대접을 가장 잘 받았다. 돌아와서 그들에 대한 작품을 구상해 오랜 시간 자료를 수집했고, 자본주의의 상징인 샤넬 No.5를 들고 있는 인디언과 여러 부족의 모습을 그렸다.”

-변종곤뮤지엄이 설립될 예정이라는데.

“광주에서 한 인사가 추진 중이다. 일본 나오시마의 멋진 이우환 뮤지엄도 돌아봤다.”

-반미작가로 낙인됐는데, 왜 미국으로 망명했나.

“70년대 후반 김대건 신부의 이름을 딴 대건고교의 미술교사로 있었다. 당시 히피문화의 영향을 받았던 나는 머리를 기르고 다녔고, 개방적인 학교 측에선 나를 ‘자유’의 상징으로 자랑스러워했다. 그런데, 정부가 내 머리를 단속하더라. 그게 싫었다. 난 반골이 아니라 애국자다. 예술가들이 부조리하고 불편한 사회에 대해 표현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 자유가 그리웠다. 어릴 적 할머니가 미군PX에서 가져다주신 제품 카탈로그를 보며 막연히 동경했고, 고등학교 때 메인주에서 생애 보낸 ‘크리스티나의 세계’의 화가 앤드류 와이어스를 알게된 후 미국에 오고 싶었다.”

◆ 극빈자에서 상류사회로
-뉴욕에서 포크싱어 한대수씨와도 교제했다.


“행위예술가 정찬승씨 소개로 만났는데, 동갑에다 둘 다 장발에 ‘자유인’이라는 점도 잘 맞았다. 미국에서 공부한 대수를 통해 미국문화를 이해했고, 식당에서 일했던 대수가 요리를 잘해서 난 건강도 회복할 수 있었다. 대수가 ‘네가 뭐가 잘 나서 일 안하냐! 나도 사진관에서 일하는데, 한 푼도 없는 놈이 그림만 그리다 죽을래!’라며 질타했다. 난 ‘영어도 못하고, 영주권도 없어서, 막노동하면 몸 망가진다. 또, 붓을 놓으면 영영 그림 못그릴 것’이라고 항변했다. 난 인격적으로 모독당한 것 같아서 한동안 대수를 만나지 않았다.”

-그림은 잘 그려지던가.

“물감 살 돈이 없어서 거리로 나가 버려진 물건을 주우러 다녔다. 당시 한국은 연탄재조차 버리지 않을 정도로 아껴 썼다. 버려진 물건을 집으로 갖고 와 TV, 라디오, 냉장고 문짝 등 뜯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물건이 사람을 닮았더라. 너무나 외롭던 시대였다. 오브제를 보니 붙여보니 스토리가 됐다. 그래서 아상블라쥬가 나온 것이다.”

-그러다가 생선가게에서 일했다.

“어느날 일하기로 마음을 먹고 찾아보니 생선가게에 자리가 났다. 하지만, 산 생선 목자르는 일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이윽고 자살까지 생각하게 됐고,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 내가 그린 목욕탕 그림을 앞에 걸어두고 늘 봤다. 그러다 운명을 바꿀 사람을 만난 것이다.”

-누구였나.

“어느 날 고객이 ‘저 그림 누가 그렸냐’고 물어서 나라고 하니, 그가 ‘당장 옷을 벗고 나오라’고 하더라. 리버데일갤러리의 헬무트 지츠위츠로 ‘널 살 수 있게 해줄께’라고 했다. 그림을 보자고 해서 언더우드 타자기 확대해 그린 그림을 가져갔다.”

-반응은.

“놀라더라. ‘한국이란 나라를 잘 모르지만, 미국의 팝아티스트들 중에도 이렇게 잘 그리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며칠 후 내게 두꺼운 봉투를 주었다. 그림을 판 돈 3만불이 들어있었다. 그 후로 물감도 사고, 뮤지엄을 돌고 작가들을 만나게 됐다. 얼마 후 리버데일 프레스에 ‘미국을 새로운 눈으로 본다’는 제목으로 전면에 인터뷰가 나왔고, 한국에선 ‘사라졌던 변종곤, 미국에서 성공하다’며 소개됐다.”

-그리고, 결혼도 했다.

“타자기 그림을 산 미국여성과 결혼했다. 센트럴파크가 내려다보이는 아파트에 살며, 고위층 파티에 가고, 이스트햄턴의 섬머하우스에서 지내는 상류사회 생활을 했다. 그녀는 ‘나를 따라달라’고 요구했다. 당시 백남준 선생이 차츰 유명해지고 있었는데, 내가 부러워하니 나를 금방 유명한 작가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할렘의 불난 집을 계속 그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내가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자 자꾸 푸시를 했다.

내가 고집을 피우자 참견을 했다. 그녀의 초이스대로 살아야했다. 한국 친구도 못만났고, 한국어도 못했고, 영어도 안됐다. 영어가 되지 않아서 싸울 수도 없었다. 그녀도 힘이 빠졌고, 나는 병 안의 일본인형처럼 행복하지 않았다. 나는 사육되는 기분이었고, 갈수록 내가 다쳐가고 있었다. 청바지와 자유가 그리웠다. 마침내, 맨몸으로 빠져나왔다.”

◆ 그림은 내 몸의 ‘눈’
-그 후로는.


“헬무트에게 전화했더니 ‘브라보! 넌 진짜 훌륭한 작가’라고 하더라. 그래서 그의 집에 살면서 새 출발했다. 그 후 올림픽 때 백남준씨와 함께 서울에서 가서 시공에서 전시했는데, 그림이 팔리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경제적으로 풀렸다. 특히 바이올린 그림은 유명인사나 재벌가가 딸 시집갈 때 사주는 선물처럼도 인식됐다고 하더라. 그 후 집도 사고, 세계여행을 다닐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최저와 최상의 생활을 경험했다.

“어릴 때 할머니가 키우시면서부터 화가의 길을 닦아준 것 같다. 할머니가 백지를 붙여 그림을 그리게 했고, 사쿠라 물감을 사주셨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시나리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 극과 극의 경험을 주는데 좋은 작가가 안될 수 있을까.”

-좋은 작가가 되려면.

“자기 몸을 잘 관리해야 한다. 예술가들은 좋은 그림을 그리려면 건강을 지켜야 한다. 난 잡기를 못한다. 낚시·바둑·화투·당구·골프 등 손에 대본 적이 없다. 담배는 피웠지만, 술은 체질에 맞지 않아 못 마신다.”

-그림은 본인에게 무엇인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이다. 다른 장기는 쉽게 갈고, 없이 살 수 있어도 눈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다. 최근에 눈을 다쳤었는데, 눈이 없으면 작업을 연장할 수 없고, 눈을 통해 많은 것을 크게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박숙희 문화전문기자 sukie@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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