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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마당] 이름값

김외출

고향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Y여고로 진학했다. 등교 첫날 담임선생님으로 마치 영화배우처럼 멋있는 분이 오셔서 반 친구들은 기뻐 날뛰었다.

선생님은 부임 인사를 마치고 출석을 부르다가 갑자기 외출이가 누구냐며 우리를 둘러보셨다.

"저예요"하고 손을 번쩍 들었다.

"너 조회 끝나고 교무실로 와." 순간 무척 당황했다. 무슨 일일까? 선생님의 화난 듯한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학생이 교무실로 불려다니는 것은 우선 창피할 뿐더러 겁나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 때문에 친구들과 사귀는 것이 힘들어 주눅이 들던 터라 불안한 마음으로 선생님을 뵈러 갔다.



그러나 선생님은 대뜸 하는 말이 "너 야간에 외출 많이 했지"라는 것이었다. 조금 전과는 달리 빙그레 웃으시는 모습에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아닙니다. 전 아직 서울 지리를 몰라 낮에도 외출을 잘 못해요."

"앞으로 너 야간에 외출하려면 나에게 먼저 허락받고 해. 내가 훈육주임이야 앞으로 조심해."

처음에는 그런 분이 야속하기도 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유머러스한 선생님이 좋아서 그 분의 수업시간이 기다려졌다.

로마의 시저도 부하를 발탁할 때 이름을 참작했다고 한다. 우리와 문화 풍습이 다른 나라에서도 이름에 대한 호감도는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이름은 그 사람의 신분이나 인상이 연상 된다고 하는데 과연 나는 어떤 모습으로 떠오를까 ?

공무원으로 일할 때였다. 어느 해 교육을 받던 중 출근길에 버스가 정류장에 정차하지 않고 몇 대가 그냥 지나치는 바람에 영락없이 지각을 했다. 결석으로 처리되었을 출석부를 정정하려고 내 이름을 교관에게 밝히자니 매우 곤혹스러웠다. 그래도 그날은 그럭저럭 잘 넘겼다.

교육 일정이 거의 끝날 무렵 피교육자들의 명단이 나왔는데 내 성별이 남자로 되어있었다. 짓궂은 남성 동료들이 서무과로 전화를 걸어서 김아무개가 분명히 여자인데 왜 남자냐며 따지는 통에 난처했다고 교관이 광고를 했다. 수많은 남자들 틈에 몇 명 안 되는 숙녀들에게 관심이 쏠리는 것은 음양의 조화라지만 이름이 평범했다면 그들이 그토록 잘 기억해 주었을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 이름이 거론된 것이 부끄럽고 속상했지만 곧 마음을 가다듬었다. 외출아! 참자. 미스코리아도 아닌 내가 그 잘난 남성들의 관심을 톡톡히 받은 것만도 영광이다. 애써 자신을 다독이며 무사히 교육을 마쳤다.

세월이 흘러 자식들이 자라서 큰 아들 혼인날이 정해졌다. 남편이 청첩장을 인쇄해 왔는데 양가 어머니들의 이름은 빼고 두 사돈의 이름만 찍혀 있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당장 그에게 따졌다. 자식을 애서 키웠는데 청첩장에 어미 이름이 없다니…. 그러나 남편은 별 반응이 없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의 속셈을 알고 있는 터라 섭섭했지만 참고 오히려 미안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 일로 사돈댁에서 많이 언짢아해서 청첩장을 다시 찍어 늦게나마 어미의 체면이 섰다.

애주가인 그는 기분이 아주 좋을 때는 한샘 씨(그가 지은 애칭) 또는 작가선생님이라 부르고 조금 좋을 때는 금출 씨이고 보통 때는 외출이다. 그러나 내가 기분을 좀 상하게라도 하는 날은 "야! 똥출아"로 격하된다. 이름 때문에 생긴 에피소드는 그밖에도 많다. 시댁 대소사에 친인척들이 모일 때면 대구에 사는 셋째 시동생이 "마님 오늘도 쉬지 않고 외출하셨습니까?" 하고 넙죽 절을 한다. 그러면 나도 시침 딱 떼고 "오냐 그동안 잘 있었는가"하고 넘기지만 그럴 때마다 별난 이름을 지어준 부모님에 대해 원망도 많이 했다. 때로는 개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함께 한 긴 세월이 생각을 바꾸게 했다.

어느 겨울 어머니께서 우리 집에 잠시 다니러 오셨을 때 내 이름에 대해 여쭈어 보았더니 어머니는 무겁게 입을 여셨다. 할아버지께서 삼 형제를 두었는데 모두들 생활이 어려워서 둘째인 아버지가 할아버지 할머니 큰집 작은집 식솔들을 우리 집에서 함께 살게 했다고 하셨다. 그런데 작은 어머니가 임신을 했는데 공교롭게도 산월이 어머니와 같았다. 속설에 한 지붕 아래서 두 사람이 같은 달에 출산하면 액운이 온다고 해서 나를 외가에서 낳아 외출이라고 지었다는 것이다.

그 시대가 아무리 대가족 제도라지만 그 많은 식구들과 힘겹게 살아오신 어머니의 희생정신과 덕성에 고개가 숙여졌다. 그런 사연을 알 리 없는 나는 원망만 늘어놓았으니….

이름자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고 살아왔지만 한편으로는 좋은 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 만난 사람들은 내 이름을 한번 들으면 잘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했다. 규율에 매여 사는 사람들은 외출을 얼마나 기다리는가. 이름 때문인지 어릴 적부터 얌전하지 못하고 늘 선 머슴애 같아서 어머니께서 걱정을 많이 하셨다.

지금도 각종 동아리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쉽게 사귀면서 인생을 즐길 수 있는 것도 외출이라는 이름자 덕이 아닌가 싶다. 기왕에 수필가 명단에까지 올린 이름이니 이름값이라도 하며 살아가고 싶다.

'수필과 비평'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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