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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누구든 단숨에 보게…30년 달려온 '만화 인생'

'남성적·사내다움의 만화 표상' 이현세씨

시대흐름·가치관·사회현상·자연다큐 등 인문학적 관점서 소재찾아
손자·손녀에게 읽어줄 동화 그리기 위해 아이들과 가교 찾고 있는 중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선택된 삶' 살았기에 미련이나 후회는 없어


그는 자신을 '만화 작가'라 표현했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이사장이기도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이기도 했지만 모든 것에 앞서 이현세는 만화 작가였다. 30년이 넘게 만화만 그렸고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쉼없이 만화를 그린다. 한국 만화에 있어 이현세는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모퉁잇돌이다. 때문에 만화에 대한 그의 태도와 철학은 그대로 '한국 만화의 귀감'이 될 수 밖에 없다. 최근 남가주를 방문한 만화가 이현세를 만나 그의 만화 인생을 들어봤다.

-그 동안 한 번도 같은 소재를 그린 적이 없으십니다.

"'공포의 외인구단'을 그릴 무렵이었습니다. 만화 작가로 롱런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을 했어요. 뛰어난 감각타고난 문장력누구도 넘볼 수 없는 드로잉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니니 뭐로 승부를 봐야 할까 생각해 봤죠. 그때 '한번 그린 만화를 두 번 그리진 말자'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독자들이 '이현세가 다음엔 무슨 이야기를 할까' 궁금하게 만들고 싶었어요. 그 이후 아무리 히트를 쳐도 속편이란 걸 안 만들었습니다."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요.

"항상 호기심을 갖고 소재를 찾아 왔습니다. 시대의 흐름 가치관 사회현상 자연 다큐 등을 인문학적 관점으로 바라보고 관찰해왔어요. 매번 새로운 것을 그리다 보니 한 분야에 전문적인 작가들보다는 실수가 많았지요. 각오한 일이었어요. 그것을 연출로 극복하려 노력했지요. 누구든 처음 이현세 만화를 볼 때는 무조건 단 숨에 보게 하겠단 생각이었어요. 두 번째부터는 옥에 티가 보여도 상관없지만 처음부터 그렇다면 제 스토리나 연출에 문제가 있었단 뜻일 테니까요. 그게 지금껏 제가 만화를 대해온 태도입니다."

-학생들에게도 같은 자세를 강조하십니까.

"그건 강요하지 않습니다. 내 스타일일 뿐이에요.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관찰력기록그리고 지구력과 인내심입니다. 자기 능력을 파악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단순히 만화를 좋아할 뿐인가 아니면 정말 재능이 있는 것일까 최고로 몰입했을 때 내 역량은 어디까지일까 과연 마감이나 독자들의 반응과 전쟁을 치러가며 연재를 할 수 있는 사람일까 등을 진지하게 고민하라고 가르칩니다."

-눈 여겨 보는 후배 작가들이 있다면.

"몇 명 보입니다.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에요. '이끼'를 그린 윤태호 작가도 아주 뛰어나고 '츄리닝'을 그린 국중록.이상신 작가도 대단합니다. 하일권 작가도 훌륭하죠."

-지금껏 가장 흡족했던 작품은 어떤 것인가요.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작품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냥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을 뿐이죠.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걸 혼자 다 해낸 첫 작품 '국경의 갈가마귀' 대한민국에 까치와 엄지란 캐릭터를 정착시키고 신드롬을 일으켜 제가 상업작가로 살아갈 수 있는 이정표가 돼 준 '공포의 외인구단'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또 대본소에서만 거래되던 만화를 일반 서점에서 다른 소설가나 인문 서적 작가들과 동등하게 경쟁하며 선보일 수 있게 만들어준 '남벌'도 기억에 남지요.

하지만 이렇게 스케일 큰 작품들에는 분명 일정부분 스토리 작가의 영역도 존재했기 때문에 '완전히 이현세적' 이라고 말하기는 힘들 듯 합니다. 작가적 완성도 보다는 기획 감독으로서의 완성도가 높은 작품들이죠. 이현세라는 작가가 그리고 싶은 세계가 더 온전히 들어가 있는 작품들은 오히려 잘 알려지지 않은 소품들인 듯 합니다."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됐으면 싶은 작품은 없습니까.

"개인적으로는 많습니다만 '남성적''사내다움'이라는 이현세 만화의 기본적 특징을 이 시대에 어떻게 재해석하느냐의 문제가 남아있습니다. 최근 드라마로 리메이크됐던 '공포의 외인구단'이 실패한 이유도 그겁니다. 신화 속 영웅들이 그랬듯 혹독한 시련과 고통이란 통과 의례를 겪고 성장하는 주인공들의 스토리가 원작의 골자였다면 이마저도 즐기고 싶어 하는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그 가치를 그대로 전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었죠.

엄지로 상징되는 여성의 사회적 몫에 대한 부분도 트렌드에 맞게 옮기는 데 실패한 것이고요. 작품이 갖고 있는 원래의 정신들이 이 시대에 더 이상 가치가 없다고 평가절하한다면 그건 곤란합니다. 하지만 분명 시대에 맞는 변화는 시켜줘야겠죠. 작가들에게는 참 민감하고 어려운 문제입니다. 바뀌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너무 바뀔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특별히 그런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지구력이 떨어져 눈과 손목이 쉽게 피로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더군요. 젊을 때는 20시간을 내리 일하고도 갑자기 영감이 떠오르면 그대로 다시 10시간씩 그림을 그리곤 했는데 이제 그렇게 억지를 부리고 나면 죽을 지경이 돼요. 일 좀 하고 나면 아무리 물을 마셔도 퍼석퍼석해진 손이 돌아오지 않으니 야단이죠.

운동을 해야 하는데 아직은 술이나 잠 혹은 소파에 가로누워 TV나 보는 게 더 좋으니 큰일입니다. 세월과 싸우는 것은 허망한 짓이에요. 그래서 좀 더 집중력을 갖고 일하려 합니다. 하루 4~5시간 최대 8시간까지만 일할 생각이에요. 나중에 집에서 쫓겨나지 않으려면 가족들을 위해서도 시간을 좀 투자해야 하니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에 몰입해야죠."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나이 70 무렵엔 손자 손녀들에게 읽어 줄 만한 동화를 그리고 싶습니다. '동화 읽어주는 허연 수염 할아버지'쯤으로 콘셉트를 잡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지금부터 아이들과의 가교를 만들려 노력하고 있어요. 한국사나 세계사를 만화로 그리는 작업도 했고 남녀노소 누구나 볼 수 있는 만화 삼국지 작업에도 돌입했습니다. 이현세가 읽어주는 이솝 우화나 셰익스피어 고전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창작 만화는 아직 생각 중입니다. 바다에서 헤엄치듯 소재를 고르는 중이죠."

-인생의 여정 중 어디쯤 와 있다고 보시나요.

"글쎄요. 분명 아직 여행의 도중이긴 한데 석양 무렵의 주막일까요 아니면 별이 무수히 쏟아지는 한밤 중일까요? 그건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여한은 없습니다. 누구보다 선택된 삶을 살았어요. 하고 싶은 일은 하고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으며 제 의지대로 살아왔죠. 그러니 내일 당장 세상이 어떻게 된다 해도 미련이나 후회 같은 것은 없습니다."

글=이경민 기자 사진=백종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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