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 따라잡기] '토이스토리' 등 10년간 64억달러 흥행 대박
할리웃 황태자-11
실리콘 밸리의 황태자였던 잡스는 넥스트 컴퓨터의 경영실패로 테크월드에서 그 이름이 사라지는가 했지만 만화영화를 통해 할리웃 황태자로의 반전드라마를 창출했다. 하지만 "더이상 공짜는 없다"는 단순한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애플 컴퓨터의 공동창업주였던 잡스는 이미 나스닥 상장을 통해 20대 백만장자란 소리를 들었지만 30대중반에 접어들면서 1억달러에 달했던 개인재산중 8000만달러를 탕진하며 거덜나기 일보직전까지 몰렸다.
뿐만아니라 넥스트와 픽사 두 회사를 경영하면서 보여준 잡스의 리더쉽과 판단력은 언론의 도마위에 오르기에 충분했다. 하늘아래 나뿐이 없다는 식의 거침없는 행보를 보였던 잡스가 좌절과 패배의 쓴잔을 들이키며 내적인 성숙기를 가졌던 것도 이때였다.
컴퓨터 판매 위해 디즈니 방문
89년 여름 잡스는 처음으로 디즈니사를 방문했다.
물론 컴퓨터 애니메이션회사 픽사를 등에 업고 넥스트 컴퓨터를 판매하기 위한 전략적 미팅이었다. 이날 버뱅크 디즈니 스튜디오 미팅에 등장한 사람은 제프리 카잔버그 수석부사장과 마이클 아이즈너 회장. 전세계 영화계를 움직이는 두 거물이었다. 디즈니로서는 실리콘밸리의 황태로 알려진 잡스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지만 픽사의 애니메이션이 관심이었다.
이날 잡스는 넥스트에서 방금 출시한 두종류의 컴퓨터를 들고 왔다. 하나는 업무용 컴퓨터 모델에 흑백모니터를 붙였고 다른 하나는 그래픽 전문 컴퓨터로 컬러 모니터를 장착했다. 잡스는 할리웃 최고의 권력자 두사람을 향해 특유의 완벽 프레젠테이션을 펼치면서 영화산업의 미래가 자신의 그래픽 컴퓨터에 달렸다고 주장했다.
잡스의 열띤 설명이 끝나자 카잔버그가 일어나 컴퓨터 앞으로 다가왔다. 흑백모니터를 가리키며 "업무용 컴퓨터는 천대 정도 사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컬러 모니터 컴퓨터를 보며 "이것은 아티스트용이다." 날카로운 눈매의 카잔버그는 잡스를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애니메이션은 내것이다. 이에 대한 어떤 도전도 용납할 수 없다."
실리콘 밸리의 황태자가 잡스였다면 당시 할리우드 황태자는 제프리 카잔버그. 두 사람 모두 독재자형 리더였고 결코 어울리 수 없는 같은류의 사람들이었다. 심한 모욕을 느낀 잡스였지만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89년은 잡스에게 분기점의 해였다. 넥스트 운영체제를 라이센스화하자는 IBM의 제의를 말도안되는 이유로 거부한 잡스였다. IBM은 잡스에게 계약금만 6000만달러를 제의했다.
독점도 아니었다. 이같은 소문이 나돌자 컴팩과 델 컴퓨터까지 잡스에게 줄을 섰다. 컴퓨터 업계 천하통일을 이룬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즈 95 운영체제가 발표되기 6년전의 일이었다. 이때 잡스가 현명한 결정을 내렸다면 마이크로소프트는 절대로 오날날의 회사가 될 수 없었다.
잡스의 오판으로 결국 넥스트는 파멸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픽사 역시 깨진독에 물붓기식으로 재정이 악화됐다. 이유는 잡스 때문이었다.
인수할때는 40여명의 단촐한 직원이었지만 픽사의 그래픽 이미징 하드웨어를 메디컬 특수 컴퓨터로 고가에 팔겠다며 마구잡이식으로 직원을 늘려 130여명으로 몸집을 불렸다. 하지만 89년 한해 1000만달러의 적자를 기록하고 말았다.
픽사, 기업공개 후 주가 급등
기회를 날린 것도 잡스 잘못된 결정을 내린 것도 잡스. 하지만 그는 최악의 상황이 몰려오고 있음에도 "난 성공할 수 있다"는 자존심 만큼은 버리지 않았다.
93년 '토이스토리'의 하청 계약을 위해 디즈니와 두번째 미팅에서 잡스는 다시한번 놀림을 당했다. "토이스토리" 제작비가 얼마냐는 카잔버그의 질문에 잡스는 최소 2200만달러가 든다고 말했다. 카잔버그는 "1700만달러를 맞추지 못하면 집에 돌아가라"고 말했다. 극장수입 12.5% 의계약서를 받아든 잡스는 "이것만해도 다행"이란 생각이었지만 알고보니 디즈니의 장편애니메이션 평균 제작비는 3000만달러였다.
픽사의 사업모델은 "애니메이션 아티스트와 컴퓨터 테크놀러지의 결합"이었다. 디즈니는 애초 "토이 스토리"에 극력한 거부반응을 보였다. 수백명의 손으로 작업하는 애니메이터들의 회사인데 컴퓨터에 밥그릇을 빼앗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이즈너회장의 신속한 결정으로 "토이스토리"가 본격적인 제작에 들어가자 잡스는 절대 기회를 놓칠수 없었다.
그가 95년 봄 픽사의 상장을 기획했을때 모두가 반대했다. 가능성이 제로였기 때문이었다. 상장의 전제조건은 조직화된 회사가 일정기간 영업이익을 내야한다. 5000만달러의 적자 회사 픽사의 상장 계획은 누가봐도 코미디였다.
헌데 95년 여름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웹브라우져 회사 넷스케이프가 단 한번도 수익을 낸적이 없는 회사로 월가 사상 처음으로 상장에 성공한 것이다. 사실 이것은 '닷컴 버블'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잡스는 "그것봐라"하면서 고집을 꺽지 않았다.
'토이스토리'가 개봉되고 흥행대박을 예고했다. 1주일 뒤 픽사 경영진과 잡스 그리고 증권회사 브로커가 모였다. 오전 7시를 기해 픽사의 기업공개가 진행될 예정이었다. 긴장한 브로커는 픽사의 운영상태를 감안해 주당 12-14달러에 주식거래를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잡스는 22달러여야한다고 고집했다.
순전히 배짱이었다. 아무리 옆에서 말려도 잡스의 고집을 꺾을 사람은 없었다. 주사위가 던져진 순간 순식간에 22달러로 거래가 시작된 픽사주식은 47달러까지 치고 올라갔다. 대박이었고 잡스가 옳았다는 것을 입증했다.
픽사와 잡스의 성공에는 다음과 같은 이론이 성립된다. 9년동안 개인돈 5000만달러를 쏟아부우면서도 끝까지 픽사를 포기하지 않았던 잡스의 집념. 모든 전문가들이 불가능하다는 픽사의 기업공개를 고집한 뚝심.
마지막으로 할리웃 생태계를 꿰뚫어본 통찰력. 잡스는 컴퓨터 애니메이션의 미래를 확신했고 디즈니에 없는 픽사의 애니메이션 감독 존 레세터를 믿었다.
'토이스토리'의 성공에 이어 '벅스라이프' '토이스토리 2 & 3' '파인딩 네모' '인크레더블스' 'Wall-E' 등등 픽사는 만드는 작품마다 기록적인 성공을 이어갔다.
2006년까지 픽사는 10년동안 64억달러에 달하는 전대미문의 흥행수익을 기록하면서 할리우드 최고의 스튜디오로 등극했다.
반면 디즈니를 떠나 스필버그와 스튜디오를 차린 카잔버그는 한때 할리웃의 황태자였지만 픽사에 필적할 작품은 아직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잡스는 "할리웃은 이제 내것이야"라고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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