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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영묵의 테마가 있는 여행-페루 여행기를 마치고] 평화 갈구하는 원주민들의 눈동자를 마음에

여행을 다니면서 그 동안 여행기를 많이 쓰기도 했지만 웬일인지 이번 페루 여행은 못다 한 이야기가 있는 것 같고 또 아쉬움이 생긴다. 왜 그럴까? 이렇게 생각하다가 이번 페루 여행의 가이드의 얼굴이 떠오른다. 미스터 라라는 젊은이였다. 그는 꼭 아버지처럼 여겨지는 형님으로부터 금전적인 도움으로 대학을 졸업했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형님이 이곳 페루에서 수입업을 하다가 은행 강도를 만나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이에 동생인 미스타 라가 페루에 와서 보험금 처리, 또 형수와 식구의 귀국 등의 사후 처리를 하다가 그만 페루가 좋아서 눌러 앉아 살게 됐다고 하면서 살수록 정을 느끼고 페루에 오길 잘 했다고 생각한다는 사람이었다.

나 또한 물건을 파는 사람들에서나 성당이나 식당, 하다못해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이 여태껏 세계 여러 나라 여행 중 만났던 어느 나라 현지인보다 인간적인 정이 가는 사람들이라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은 머나먼 아주 옛날의 몽골 계통의 뿌리라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페루의 불행했던 그들의 역사가 그들의 오늘의 심성을 이룬 바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금으로 팔찌, 귀거리, 목거리 등 온 몸을 금으로 휘감고 다니는 ‘페루’라는 종족이 있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그것이 그들의 오늘에 숙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세계의 역사 속에서 어느 나라도 결코 이웃나라와 아무 연관 없이 혼자만 일수는 없다. 그리고 조선조 시대에 국가의 번영과 내실을 굳건히 할 수 있었던 기회가 두 번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첫 번째가 중국 명나라의 평화 번영 그리고 일본이 영주끼리 싸워 바깥 세상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던 그들의 춘추 전국 시대인 16세기 초 그리고 그 다음이 18세기 말엽 청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 초유의 강국으로 동아시아의 평화를 지켜주고 일본의 쇼군들이 쇄국정책을 쓸 때가 아닌가 싶다. 그때가 바로 외적의 침입 없이 주위가 평화스러웠던 시대였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기회가 모두 왕과 왕후, 희빈, 숙의 등의 여인들이 등장하여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연속 드라마의 소재만 제공했을 뿐 나라의 번영을 가져오지 못했다. 바로 그 두 평화 시절 중 하나인 16세기 초 조선에서는 인수대비, 소윤(小尹), 대윤(大尹), 장경왕후, 문정왕후 운운하며 여인들이 역사를 만들고 있을 때였다

그 당시 유럽은 어떠하였는가? 이탈리아 프로랭스의 메데치 가문이 전 유럽의 전 돈주머니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역사가들은 당시 메데치가에서 돈을 꾸어야만 전쟁을 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 넘쳐나는 돈으로 새로운 건축물들과 미켈란젤로를 비롯한 많은 미술, 조각 예술가를 낳을 수 있었고, 갈릴레오 같은 과학자도 지원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레오 10세, 클레멘스 같은 교황까지도 메데치가에서 배출까지 했다. 그러나 그 풍요로움이 르네상스 시대의 초고점으로 가면서, 자아인식과 과학발전으로 영국에서는 헨리 8세가 교황으로부터 벗어나 성공회를 출범시켰고, 독일에서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이 시작됐다.



그리면서 세계는 새로운 세대를 맞이하고 있었으나 새로운 세계의 정신, 세계가 질서가 정착하는 과정에서 전 유럽의 각 나라들이 경쟁적으로 정복, 식민화, 약탈의 탐욕의 세대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도를 한 집단 중에서 큰 역할을 한 그룹이 천주교 신부들이었다. 그들은 군인이라기보다 정복자랄까 약탈자라 할까 하는 집단을 고용해 약탈한 것의 3분의 1을 그들에게 주고, 다시 3분의 1은 교황청에, 그리고 나머지 3분의 1은 자기를 파송한 성당의 몫의 조건으로 주도했다. 그리고 페루가 그 약탈 대상이 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글을 쓰면서까지 페루인의 ‘미라’를 생각하면서 그들 정복자들에게 분노를 느낀다. 페루 원주민들은 내세와 환생을 믿었다. 그래서 미라는 자궁 안에 웅크린 어린 아기의 형상이다. 사실 나는 그들 정복자의 철저한 살육과 약탈은 받아드리고, 마지막 황제 알타우알파를 죽이는 것 자체는 이해할 수 있으나, 기독교로 개종을 안 하면 다시 환생을 할 미라가 아니라 불 태워 죽이겠다고 협박하여 겁에 질린 그가 기독교로 개종을 하겠다며 애걸하게 만든 뒤 그를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죽였다는 것은 한 나라에 그리고 한 종족에 그보다 더한 치욕을 준 것은 없을 것 같다. 그것은 그들이 소위 말하는 ‘기사도’가 절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200여 년을 그들과 관계없는 식민시절을 가졌고, 19세기 초 프랑스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이 내려졌을 때를 틈타 독립을 해 ‘페루’라는 나라가 세워지고 또 200여 년 동안 지배 집단이 통치를 해도 그들과는 무관한 삶이였다.
그러나 내가 놀랍고, 그들에게 애정을 느끼는 것은 그들이 이러한 역사를 가졌다면 당연히 어떤 사람들은 무기력을, 누구는 분노를, 또 어떤 사람들은 간사함을 가졌어야 했건만 그들의 눈은 무기력이나 슬픔이 아니라 평화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따듯한 눈동자의 마음을 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다가 이 글을 쓰는 오늘 그들에게서 새로운 메시지를 받았다. 보수 기성층에 절대적인 지원을 받은 게이코 후지모리 대통령 후보의 당선이 유력시 되었는데, 뜻밖에도 서민층의 지지를 받는 원주민 출신의 오얀따 후보가 당선된 것이다. 그들은 이제 미래를 꿈꾸기 시작 한 것일까? 아니 어쩌면 우주인들에게 우리에게 와서 행복을 달라고 저 높은 하늘을 보면서 사막의 그림 ‘나스카’ 그림을 그렸던 그들이 이제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희망의 세계로 그들은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런대로 여러 나라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에서도 느끼지 못한 평화의 눈길을 애정의 눈으로 사는 페루 원주민들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면서 언제인가 다시 찾을 때에는 평화보다 밝은 미래를 꿈꾸는 그들의 눈동자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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