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근들이 DJ를 닮은 까닭…안 되면 될 때까지…
치밀한 설득에 DJ식 언행 몸에 배
책 읽는 시간만큼 생각, 논리 탄탄
훈장식 리더십으로 충성심 끌어내
YS 감의 리더십과는 극과 극
편지 내용은 구구절절했다. “평생 당신을 미워하며 살았다. 하지만 정계를 은퇴하는 모습이 쓸쓸해 보여 당신이 쓴 책을 구해 읽었는데 그동안 미워했던 게 후회가 된다. 요즘 내 주변 친구들도 비슷한 얘길 한다. 혹시 국민이 부르면 다시 복귀할 생각은 없나.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다. 답장 꼭 해달라. 가보로 보관하겠다.”
편지 낭독이 끝나도 DJ는 고개를 숙인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한참 만에 DJ가 말했다. “내가 여기서 독일 통일과 유럽 통합을 연구하고 있어요. 한국 현대정치사도 정리해 볼 생각입니다. 영국 역사가 아널드 토인비가 있죠? 그 사람은 계속되는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하면서 문명이 발전한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나도 한평생 6·25와 민주화, 대선 등 끊임없는 시련을 겪었어요. 지금 주어진 이 도전에도 잘 응전해 나갈 생각입니다.”
그러더니 편지를 달라고 해서 자신의 책 갈피 사이에 끼워놓았다. DJ가 답장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안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국에서 그 편지를 여러 번 읽으면서 정계복귀의 힘을 얻었을 것이란 생각은 든다. 일단 말문이 터진 DJ가 까만 사인펜을 들고 벽에 걸린 지도를 가리키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장 동지, 여기에 영국, 그 옆에 프랑스가 있죠? 그런데 수도인 런던은 동남단에 위치해 있고, 파리도 센강 하구인 북서지방 끄트머리에 있죠?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은 대서양과 직면해 있고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는 동쪽 끝이죠? 왜 전부 수도가 중앙에 없고 최전방에 위치해 있겠어요. 그건 전쟁이 나면 국왕과 귀족이 선두에 서서 나라를 지켰기 때문이에요. 지배층이 나라를 지킨 장소가 바로 수도가 된 거죠. 우리 왕조들은 어땠어요? 신라도 삼국통일을 했으면 수도를 평양으로 갔어야죠. 고려도 개성에 수도를 두고 평양으로 가자는 묘청을 처형하지 않았어요? 이렇게 왕실보존을 우선으로 하니 비(非)진취적이 된 겁니다.”
DJ는 아주 한참 동안 유럽과 한국의 역사를 ‘강의’했다. DJ는 나중에 귀국한 뒤 일산으로 집을 옮겼다.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을 만들고 통일 문제, 동북아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이날 나에게 설명했던 대로 접적(接敵) 지역 쪽으로 좀 더 이동해 간 것이다.
하지만 이 에피소드를 전하는 진짜 이유는 DJ의 ‘훈장식 리더십’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DJ의 주변에는 한평생 충성스러운 측근들이 있었다. 권노갑·한화갑·한광옥·김옥두·남궁진·윤철상 같은 이들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밖에도 목숨 걸고 DJ를 추종하고 지지한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물론 나도 그중 하나다. 이 대목에서 궁금증이 생길 것이다. DJ는 과연 어떤 방법으로 충성을 얻어낸 걸까. 그의 리더십의 요체는 뭘까. 오랫동안 DJ를 지켜보며 내가 얻은 답변이 있다. 그가 주변의 존경과 충성을 획득하는 비결은 바로 ‘설복(說服)’이다. 말 그대로 설득해서 복종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정치를 하면서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가장 큰 무기가 ‘감(感)’이었다면 DJ의 경우 그것은 ‘논리’였다.
복잡한 상황이 발생하면 DJ는 일단 주변의 얘기를 돌아가며 듣는다. 그리고 혼자 꼼꼼히 정리한다. 그게 끝나면 다 함께, 혹은 따로따로 측근들을 부른다. 그들을 앉혀놓고 상대방이 자기 논리를 완전히 이해하고 승복할 때까지 끊임없이 설명하는 것이다. 일단 설복되면 측근들은 밖에 나가 마치 자기 논리인 것처럼 DJ의 논리를 전파한다. 그야말로 이구동성(異口同聲)이다. 그런 과정에서 여론이 생겨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DJ 측근들은 말투와 몸짓까지 DJ를 흉내 낸다”고 비판한다. 사실은 흉내 내기가 아니다. 이런 과정을 오랫동안 반복하고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익히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DJ는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 석·박사는커녕 학사 학위도 없다(1992년 모스크바 대학 외교 아카데미에서 정식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이는 논외로 하자). 한데 무슨 방법으로 자기보다 학력이 월등히 높은 사람들을 제압하는 논리력을 갖춘단 말인가. 해답은 ‘책과 사색’이다. DJ는 끊임없이 책을 읽었다. 책을 안 읽는 사람들은 별로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그냥 읽는 게 아니다. 10시간 책을 읽었으면 반드시 10시간 이상 생각해서 책의 논리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메모를 하고, 입에서 줄줄 나올 때까지 생각을 가다듬었다. DJ의 사고(思考)가 결코 간단치 않았던 건 그래서다.
내가 영국에 가 있는 동안 국내에선 복잡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3월 11일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YS정부가 출범했고, 새로운 조각(組閣)이 이뤄지는 시기인 데다 대선에서 패배한 정당의 전당대회다 보니 국민의 시선을 끌지는 못했다. 하지만 DJ가 떠난 후 야당의 권력지도와 지형이 변화하는 것이어서 의미가 결코 작지 않았다. 영국에 도착하자 DJ는 나에게 “전당대회를 앞둔 당내 분위기가 어떤지 권노갑 의원에게 전화해서 파악해보라”고 지시했다. 당 대표 경선에는 3명이 나왔다. 이기택 대표와 김상현·정대철 의원이다. 선거의 핵심은 ‘김심(金心)’ 논란이었다. 영국의 DJ가 누굴 지지하느냐는 것이다. 이 대표는 ‘김심’이 자신에게 있다고 했다. 또 91년 8월에 신민당과 민주당이 합당하면서 김대중·이기택 공동대표 체제가 출범했었으니 이젠 자신이 대표가 되는 게 마땅하다는 순리론(順理論)을 덧붙였다. 반면 경쟁자인 김상현·정대철 의원은 ‘김심은 무심(無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DJ는 정말로 이 대표를 지지했던 것일까? 그런 것 같다. 우선 ‘김심’의 가늠자였던 권노갑 의원이 이 대표 지지의사를 밝혔다. 또 언론에는 “DJ의 장남인 김홍일 의원이 호남에서 김심 전도사 역할을 한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영국에서 만난 DJ도 이 대표를 지지한다는 느낌을 줬다.
하지만 ‘김심’을 등에 업고도 이 대표는 고전했다. 대다수인 호남 출신 대의원들이 ‘포스트 DJ’를 부산 출신 이 대표에게 넘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치러진 전당대회는 1차에서 승자를 가리지 못했다. 이 대표가 43.8%인 2743표를 득표했다. 절반에서 83표가 모자랐다. 김상현 1928표, 정대철 944표였다. 자정이 넘겨 치러진 2차 투표에서 정대철 의원이 김상현 지지를 선언했지만 결과는 이기택의 승리였다. 하지만 그것은 지구 반대편에 떨어져 있는 ‘김심’의 승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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