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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하나님께” 평생을 우상 숭배와 맞서다

유럽 종교개혁 500년, 그 현장을 가다
[하·끝] 제2의 개혁-스위스의 칼뱅

예수상도 우상 숭배라고 금지
미사 대신 설교를 예배 중심에
예정설 주창해 격한 논쟁 낳아
"어떤 묘비도 만들지 말라" 유언


프랑스 출신 장 칼뱅(1509~64)은 종교개혁 2세대다. 그는 독일의 마르틴 루터(1483~1546)를 계승하면서도 루터와 달랐다. 칼뱅은 “하나님께 바쳐진 희생제물처럼 내 심장을 하나님께 드린다”며 종교개혁을 위해 싸웠다.

그는 신앙에 철저했고, 엄격했고, 냉정했다. 지금도 칼뱅에겐 열정적이란 찬사와 독단적이란 비판이 동시에 쏟아진다. 유럽의 종교개혁지를 순례하며 칼뱅의 자취를 만났다.

◆루터파와 칼뱅파의 차이=독일의 개신교 교회를 여럿 들렀다. 뜻밖의 풍경을 만났다. 어떤 교회의 십자가에는 예수가 매달려 있었다. 가톨릭 성당처럼 말이다. 또 어떤 교회는 예수상 없이 십자가만 있었다.



안내를 맡은 신국일(프랑크푸르트 슈발바흐 성령교회 담임) 목사는 “루터파 교회에는 십자가에 예수님이 매달려 있다. 그러나 칼뱅이나 츠빙글리의 정신을 잇는 개혁파 교회의 예배당에는 십자가 위에 예수의 상(像)이 없다. ‘우상을 숭배하지 마라’는 입장 때문이다. 개혁파는 초기에 십자가 사용조차 금지했다”고 말했다.

그게 루터파와 개혁파의 차이였다. 루터는 “비성경적이 아니면 성경적이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성경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가톨릭적인 요소를 유연하게 수용했다. 지금도 루터파 교회에 가면 가톨릭 성당의 분위기가 풍긴다. 루터는 온건적 개혁주의자였다. 그러나 칼뱅은 달랐다. 그는 무척 엄격했다.

◆제네바의 종교개혁=독일에서 스위스의 제네바로 넘어갔다. 제네바대학 맞은편의 바스티옹 공원으로 갔다. 종교개혁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칼뱅과 파렐, 베제, 녹스 등 종교개혁가의 조각상이었다. 칼뱅은 우상숭배에 대해 매우 엄격했다. 제네바시에 자신의 조각상이 세워질 걸 알았다면 노발대발 했을지도 모른다.

1517년 루터는 종교개혁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그때 칼뱅은 9살이었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칼뱅은 14살 때 공부를 위해 파리로 갔다. 그가 파리에 도착한 날, 어거스틴파의 수도사 장 발리에르가 이단으로 몰려 파리에서 공개 화형을 당했다.

루터의 책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읽었다는 이유였다. 그는 혀가 잘린 뒤 화형을 당했다. 칼뱅은 이 참혹한 광경을 직접 목격했다. 종교개혁기의 참상이 어린 칼뱅의 신앙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프랑스 국왕이 신교를 박해하자 칼뱅은 스위스로 피신했다. 그리고 파렐의 요청으로 스위스 종교개혁 운동에 참가했다. 제네바는 이미 개신교 도시였다. 그러나 칼뱅은 제네바를 더 경건하고 엄격한 종교생활의 도시로 만들고자 했다.

칼뱅에겐 ‘제2의 종교개혁’이었다. 일명 ‘성시화(聖市化) 운동’이다. 칼뱅이 추진했던 신정정치에 대한 반발과 충돌도 많았다.

제네바 목사였던 칼뱅은 춤과 도박을 금지했다. 간음죄와 칼뱅 모독죄로 처형된 이도 있고, 삼위일체를 부인해 화형을 당한 이도 있었다. 심지어 칼뱅은 “종교개혁적 신앙고백에 참여하지 않는 시민은 누구든지 도시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지금도 칼뱅은 종종 ‘논란의 인물’이 되곤 한다.

◆장로교의 기초 닦아=제네바 시내의 성 피에르 교회에 갔다. 칼뱅은 거기서 설교를 했다. 교회 옆에는 칼뱅이 머물렀던 사택도 있었다. 칼뱅의 열정은 뜨거웠다. 그는 예배의 중심을 미사에서 설교로 바꾸었다.

흑사병이 돌 때도 병자들을 찾아갔다. 날마다 심방도 했다. 평소 갖은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의 건강보다 교회를 중시했다.

칼뱅은 장로교의 뿌리다. 그는 목사·장로·집사로 구성된 교회직제의 기초를 세웠다. 칼뱅은 “하나님이 구원과 멸망을 이미 예정해 놓았다. 그걸 바꿀 수는 없다. 사람은 단지 신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뿐이다”는 예정설을 주창했다. 그의 예정설을 놓고 개신교 내부에서도 격한 논쟁이 일었다.

칼뱅은 평생 ‘경건한 신앙, 엄격한 신앙’을 좇았다. 그의 잣대는 ‘하나님의 영광, 교회의 유익’이었다. 그러나 관용에는 인색했다. 예민하고 날카로운 성격이었다. 병실에서 죽음을 앞둔 칼뱅은 자신의 과격한 성격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나를 제네바 공동묘지에 묻되, 어떤 묘비도 만들지 마라.” 마지막까지 그는 신앙에 철저했다.

종교개혁지 순례를 마치며 의문이 일었다. 과연 우리가 돌아갈 곳은 어디인가. 그건 칼뱅도 아니고, 루터도 아니었다. 그들이 외쳤던 성서였다. ‘성서로 돌아가라. 근원으로 돌아가라.’ 그건 한국 교회에도 절실한 답이었다.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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