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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론] 한계 상황과 박정희 시대

이길주/버겐커뮤니티칼리지 교수

어제로 5·16 군사 쿠데타가 50주년을 맞았다. 때맞추어 고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 작업이 활발하다. 필자는 박정희 시대의 시종을 관통하는 개념은 한계 상황에 대한 대처라고 판단한다. 그에게는 주어진 한계 상황을 일정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얻을 수 있는 실리를 최대화 하는 능력이 있었다.

박정희 시대는 주권적 한계 상황 속에서 탄생했다. 한반도에서의 피할 수 없는 미국의 영향력을 말한다. 이 같은 한계 상황 때문에 5·16 혁명공약은 다소 어색하게 시작한다.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겠다고 나선 혁명세력이 아이러니컬하게도 현재의 국가 이념은 흔들지 않겠다는 연속성을 강조한다.

제일 먼저 등장하는 반공을 국시로 삼고 미국을 위시한 우방과의 유대를 강화하겠다는 선언은 백악관을 향한 호소였다. 박정희가 구상하고, 상당부분 현실로 이루어진 새로운 한국 사회의 모습은 제3항에서야 등장한다. 이런 한계 상황에서 국정을 시작한 박정희의 실리추구 정신은 세 가지 예에서 잘 나타난다.

첫째가 1963년 대통령 선거이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민정이양을 늦추려 했다. 미국은 반발했다. 원조를 중단하겠다며 위협했다. 박정희는 이 한계 상황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선거에 임해 당선됐다.

그는 하루아침에 반란군 우두머리에서 나라 건설자(nation builder)로 바뀌었다. 합법성을 확보한 그는 미국에 대해 당당하게 그의 필생의 화두 '조국 근대화'에 필요한 지원을 요구했다. 잉여농산물을 넘어 기술, 재원, 시장을 요구할 수 있는 지위는 그가 한계 상황 속에서 택한 정면승부의 결과이다.

미국의 월남전 개입 또한 박정권이 당면한 한계 상황을 노출했다. 한국이 월남에서 미국을 돕지 않을 경우 일부 주한미군의 재배치를 고려할 것이라는 메시지가 린든 존슨 정부로부터 흘러나왔다. 역시 박정희는 이 상황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월남전에 관한한 존슨보다 전략적으로 더 큰 그림을 그렸다. 소위 한반도와 베트남의 공동 전선론이었다. 한반도에서 김일성을 제압해야 베트남에서 호치민도 물리칠 수 있다는 논리였다. 결국 미국 정부는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계속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빠져 든다.

박정희가 가장 절실하게 한계 상황을 실감한 때는 1968년 초이다. 청와대 습격을 목표로 한 무장공비 침투사건과 미국의 정보수집선 푸에불로호의 나포사건이 연이어 발생한다. 박정희는 군사 대응을 준비했다. 미국이 강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또 다시 한계 상황에 봉착한 그는 응징을 포기하는 대신 그의 또 다른 집념 '국군 현대화'를 위한 지원을 받아 낸다. 이 당시 존슨이 참석한 백악관 안보회의의 비밀기록문에는 어쩌다 한국 같은 작은 나라에 미국 같이 큰 나라가 끌려 다니게 되었냐는 한 참석자의 자조가 그대로 담겨 있다. 한계 상황 속에서 박정희가 억척스럽게 실리를 챙겼다는 증거다.

박정희 시대의 종말은 그가 처한 한계 상황을 인정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다. 1976년 미국 대선. 무명의 지미 카터가 현직 대통령 제럴드 포드와 겨루어 승리한다. 카터의 승리는 시대적 변화요구의 표출이었다. 워터게이트로 압축되는 제왕적 대통령(imperial presidency)에 대한 종말요구였다. 닉슨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국가 공권력, 특히 정보기관을 이용한 정치적 조작술은 미국인들의 강한 반감을 유발시켰다.

자신이 이런 미국 사회의 시대적 변화를 상징한다고 믿었던 카터에게 장기집권, 정보정치, 군사대립으로 요약되는 박정희 정권은 혐오대상이었다. 박정희는 내정간섭을 외치며 반발했고, 긴장은 고조됐다. 이 상황은 결국 그의 암살로 끝났다. 한계 상황에 대한 대처는 박정희 시대의 흥망사를 푸는 열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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