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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마당] 할미꽃 간호사

윤금숙

수필 '프리지어 간호사'가 신문에 실린 그 다음 날이었다. 주위에 한국 간호사들이 수필을 보았다며 주인공이 누군지 궁금하다고 물었다.

아무래도 같은 동료의 이야기이니 관심이 갔을 것이다. 그들은 농반진반으로 자기네들 이야기도 써달라며 졸라댔다. 나는 자신도 없으면서 마치 물건을 주문 받듯 서슴없이 그들의 주문을 척척 받았다.

"나는 장미꽃으로 해주세요! 나는 코스모스 수선화 목련…."

제 나름대로 좋아하는 꽃들을 열거해 댔다. 발랄하고 명랑한 최 간호사는 누군가가 옛날에 자기보고 칸나 같다고 했었는데 하며 정열이 불탔던 간호학교 시절의 낭만을 줄줄 엮어 나갔다. 추억에 젖어 말하는 그녀의 눈엔 꿈 많던 젊음의 생기가 묻어났다. 또 복스럽게 생긴 무던한 홍 간호사는 함박꽃으로 해달라며 홍조을 띠고 싱그럽게 웃었다.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는 듯 서 간호사는 장미꽃으로 해달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녀는 첫 근무했을 때의 일을 어제의 일인양 실감있게 말했다. 잘 생긴 인턴이 자기에게 장미꽃을 매주 한 번씩 보내왔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녀는 콧대가 더 높아져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서 간호사는 그때의 일을 무슨 표적처럼 가슴에 달고 다녔다. 같은 여자의 눈에도 예쁜 서 간호사의 인기를 가히 상상하고도 남을 만하다. 장미에 가시가 있듯 그녀도 톡톡 쏘기를 잘했다. 친절이 우선인 간호사라는 직업과 썩 어울리는 편은 아닌 듯 보일 때가 있다.

어쨌거나 원하는대로 글이 척척 써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꽃과 비유해 그들의 모습을 관찰해 보니 비슷한 점이 많아 신기했다. 꽃에 각기 다른 색깔과 향기가 있듯이 사람들에게도 그들 나름대로의 천태만상의 성격들이 있다.

우리 인간들은 외모나 실력이 남보다 조금만 나아도 금세 교만해지고 안하무인 격이 되는 경우가 많다. 어리석은 우리들이 감히 꽃들의 침묵을 깨달을 수 있을까. 꽃들은 교만하지 않고 인내할 줄 알며 어느 곳에서나 각자의 본분을 다 하고 있었다. 자연의 섭리를 반항하지 않고 묵묵히 겸손하게 받아들인다.

한참을 떠들다 옆을 보니 유 간호사가 조용히 미소만 짓고 있었다. 모두들 흥분해서 한마디씩 유 간호사에게 물었다. "자기는 무슨 꽃이 좋아?" 몸매가 가냘픈 그녀에게 코스모스로 해라 수선화로 해라 온갖 그럴 듯한 꽃이름들을 붙여댔다.

"언니! 나는 왠지 옛날부터 할미꽃이 좋아요"하며 살풋이 고개를 숙였다. "얘좀 봐! 하필이면 늙어 꼬부라진 할미꽃이람! 청승맞게 기운 빠져! 하여튼 얘는 젊은 애가 박력이 없다니까. 알아줘야해!" 주위에서들 중구난방으로 한마디씩 핀잔을 주었다. 나는 '할미꽃'이란 말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잊고 지냈던 옛 고향의 언덕이 생각났다. 젊어서 폐병으로 죽은 이모의 무덤가에 피어 있던 할미꽃. 털북숭이 할미꽃은 멋쟁이 이모의 자줏빛 비로드 치마 색깔이었다. 고개 숙인 할미꽃은 무덤 속 망자의 슬픔을 대신해 주듯 금방이라도 눈물이 주르르 흐를 것만 같았다. 나는 말로만 듣던 할미꽃이 이렇게 예쁜 줄 정말 몰랐었다.

할미꽃은 줄기 끝에 자줏빛 꽃 한 송이가 고개를 떨구고 있어 백두옹(머리가 하얀 노인)이라고도 한다. 할미꽃의 유래는 이렇게 시작됐다. 부모 잃은 손녀를 시집 보내놓고 할머니는 손녀가 보고 싶어 산마루에 앉아 손녀의 집을 마냥 내려다봤다. 그러다가 지쳐 잠이 들었다. 얼마후 손녀사위가 지나가다 자고 있는 할머니를 깨웠으나 할머니는 죽어 있었다. 그후 할머니 무덤가에 이상한 꽃이 피었다. 손녀는 그 꽃을 '할미꽃'이라고 이름 지었다 한다.

모든 꽃이 고개를 들고 '날 좀 보소' 하는 얼굴인데 비해 할미꽃은 고개를 숙이고 겸손하게 안으로 강인함을 감추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할미꽃을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아마도 늙어서 아름다울 수 있는 비법은 고개 숙인 할미꽃의 진리를 터득하는 길이 아닐까 싶다.

할미꽃 간호사! 신기하게도 유 간호사는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였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조용하고 겸손한 성격이다. 그리고 천사 같은 간호사의 이미지를 풍겼다.

할미꽃의 겉은 털북숭이 짙은 자줏빛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불타는 흑장미 같기도 하다. 또 노란 꽃술들이 촘촘하게 알이 꽉 차 있어 외유 내강인 유 간호사의 성격과 비슷한 것 같다. 연약하고 힘 없어 보이지만 환자를 돌볼 때는 할미꽃의 꽃술처럼 강인한 모습이 나타난다. 어쩌면 할미꽃 생리를 그대로 닮지 않았을까.

얼마전 임신 중에 헤로인을 복용한 어떤 산모가 아기를 낳았다. 그녀에게 금단현상이 일어났는지 발작을 일으켰다. 옆에 있는 식기나 화분을 있는대로 집어던졌다. 유 간호사는 잠시 바라보고 있다가 산모에게 조용히 다가갔다. 간호사는 그녀의 손을 끌어다가 자기의 가슴에 꼭 품었다.

난리를 치던 환자는 조금씩 수그러들더니 간호사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어깨를 떨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만가만 환자의 등을 엄마가 아기를 잠재우듯 토닥거려 주었다. 고개 숙이고 있는 할미꽃 간호사의 눈에도 눈물이 반짝했다.

할미꽃 간호사는 남편까지도 그녀에게서 등을 돌린 미운 아기엄마를 불쌍한 마음으로 다독거렸다. 비로드같이 부드러운 할미꽃 간호사. 그녀의 따뜻한 손길은 우리 주위를 밝게 비춰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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