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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향기] 논두렁으로 몸소 농민을 찾아간 성운 스님

이원익/태고사를 돕는 사람들 대표

LA근교에 있는 하시엔다 하이츠 시의 산중턱을 넘어가다 보면 길가에 누런 기와지붕의 서래사가 보인다. 서반구에서 곧 남.북 미주 통틀어서 가장 큰 절이다. 한국의 웬만한 궁전만큼 크고 장엄해서 놀랍기도 하지만 그 안을 살펴보면 더욱 놀랍다. 갖가지 포교와 신행 교육 및 문화 프로그램이 갖추어져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중국 사람들은 하는데 한국 사람들은 왜 못할까? 한편 부끄럽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은 대만 불광산의 성운 스님이 온 세계에 세운 크고 작은 수십 개의 절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 뿐이랴? 수많은 유치원과 학교 구호단체 요양원 문화단체 들이 있다. 무릇 모든 일이 그렇듯이 이 모두가 포교를 향한 성운 스님의 이상이라는 단 하나의 불씨에서 비롯되었다.

1927년생인 성운 스님은 열 두 살에 출가하여 국공내전의 끝무렵 불교 구호단의 일원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대만으로 건너갔다. 그 때가 스물 세 살이었는데 어느 날 어느 나이든 시골 불자가 이 젊은 스님을 찾아와 예를 갖추며 부탁하기를 허물어져 가는 자기 마을의 절에 들어와 법회를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다른 스님들은 한 번 와 보고는 다시는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스님은 두 말 않고 따라나섰다.

그 마을이 의란이란 곳으로 지금은 어마어마한 시설의 불광산 본부가 들어섰지만 당시에는 궁벽한 황무지였다. 그때의 대만은 한국과 비슷해서 가난한 농민이 대부분이었고 사회는 혼란스럽고 부조리하여 그 틈새로 기독교가 스며들고 있었다. 불교는 켸켸묵은 테두리에 갇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가운데 염불과 의식에만 의존하여 겨우 꾸려나갔다. 심지어 자기 절 스님이 아니면 하룻밤 잠도 안 재워 주는 형편이었다.



의란에 자리잡자 스님은 먼저 젊은 학생들을 모았고 그들을 가르쳐 전법사로 키우면서 그들과 함께 논두렁으로 몸소 농민들을 찾아갔다. 차비를 아끼려고 여러 대의 자전거를 사서 학생들과 함께 날마다 이 마을 저 마을로 들판을 누볐다. 농부들의 들일이 끝나는 저녁 나절 나무 그늘에서 법회를 열고 갖가지 재미있는 오락과 문화행사를 함께 베풀었다. 신도들이 절에 찾아오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신도를 찾아 자전거에다 절을 싣고 논두렁 밭두렁을 다닌 것이다.

이렇듯 스님은 절집을 짓고 불공을 드림으로써 포교를 한 것이 아니라 글을 쓰고 음악을 하고 학생을 가르치는 등 다른 무엇보다 문화와 교육에 의존하였다. 합창단을 만들어 찬불가를 부르게 하고 손수 가사를 썼다. 합창단을 실은 트럭이 방방곡곡을 누빈 지 몇 해만에 시골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찬불가를 흥얼거리게 되고 그에 따라 대만 불교도 들판의 불길처럼 일어나게 되었다.

들녘에서의 법회가 끝나 한 무리의 학생들과 함께 자전거를 몰고 들판을 가로질러 절로 돌아가던 어느 날 밤 벅찬 가슴으로 은하수를 쳐다보던 성운 스님의 머릿속에 불현듯 한 편의 노랫말이 떠올랐으니 지금도 널리 불리는 '포교자의 노래'다.

"하늘엔 은하수 높이 흐르고 / 밝은 달은 내 가슴을 비추네 // 들판에는 풀벌레의 울음소리 / 중생은 모두 흐릿한 꿈속에 잠겼네 // 부처님 우리를 도우사 / 가르침으로 사람들 널리 즐겁게 하소서 // 거친 들판의 부루나 존자 / 기꺼이 목숨 바쳐 불법 펴시니 // 오직 바라옵건대 / 부처님 법 불길처럼 일어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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