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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종교개혁 500년, 그 현장을 가다-중] 개혁의 꽃-독일의 루터

벌 주는 하나님 대신 사랑의 하나님 설파하다

벼락 체험 뒤 수도사의 길로
두려움 악용한 면죄부에 맞서
비텐베르크에 새겨진 '95개 논제'
예수로 돌아가라 외침 들리는 듯


'땡그러러렁!'

면죄부 헌금함 안에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다. 중세 때 교황청은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 신축을 위해 막대한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면죄부를 발행했다. 테첼이라는 수도사가 앞장섰다. 그는 열정적인 웅변가였다. “금화가 면죄부 헌금함에 떨어지며 ‘땡그랑’소리가 나는 순간, 죽은 자의 영혼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옮겨간다”고 강론했다. 그가 가는 곳마다 면죄부 판매는 성황을 이루었다. 독일의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1483~1546·사진)는 이에 맞서 싸웠다.

유럽의 종교개혁지를 순례했다. 독일 비텐베르크 루터하우스에는 중세 때 썼던 면죄부 헌금함이 있었다. 유심히 지켜보던 관람객이 동전을 하나 집어넣었다. “땡그랑!”소리가 났다. 그건 어쩌면 ‘경고의 소리’였다. “예수로 돌아가라. 성서로 돌아가라”는 루터의 외침에서 멀어지는 오늘날의 교회, 오늘날의 신앙을 향한 날 선 경고였다.
◆루터의 벼락체험=루터의 생가가 있는 아이슬레벤으로 갔다. 그곳에 기념관이 있었다. 루터의 아버지는 광부였다. 아들이 법률가가 되기를 바랬다. 방학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던 루터는 벼락을 체험했다. 주위는 캄캄하고 폭우가 쏟아졌다. 그는 땅에 엎드려 성 안나(광부들의 수호 성인)에게 약속했다. “살아난다면 수도자가 되겠습니다.” 목숨을 건진 루터는 아버지의 강한 반대에도 수도자가 됐다. 루터를 종교의 길로 들어서게 한 ‘벼락 체험’이다.
벼락 체험의 핵심은 두려움이다.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내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인간을 작아지게 한다. 그런 무너짐을 통해서 우리는 ‘벼락’을 체험한다. 그런 벼락을 사도 바울도 맞았다. 다마스커스로 가다가 말에서 떨어진 바울은 눈이 멀었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암흑 속에, 두려움 속에 빠진 것이다.
루터도 그런 두려움 속에서 인간의 연약함을 봤을 터다. 그리고 수도자가 됐다. 돈 선거와 세력다툼으로 범벅된 한국의 개신교계에 필요한 것이 바로 ‘루터의 벼락’이었다.
◆벌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아이슬레벤에서 에어푸르트로 갔다. 루터가 생활했던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 수도원을 찾았다. 고요했다. 그런 고요를 깨고 루터는 신을 찾았다. 중세 사람이 믿던 하나님(하느님)은 ‘벌 주시는 하나님’이었다. 신학도 ‘벌 주는 신학’이었다. 사제가 된 루터도 ‘벌 주는 하나님’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루터는 고해성사를 한 뒤 계단을 내려가다가 금세 달려와 “그 사이에 마음으로 죄를 지었다”며 다시 고해성사를 하곤 했다. 그만큼 루터도 ‘죄 문제’로 고민했다.
특유의 지성과 종교성을 인정받은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가 됐다. 시편과 로마서를 강의하면서 새로운 하나님에 눈을 떴다. 그건 ‘벌 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이었다. 루터는 탑이 있는 수도원 건물의 화장실에서 그걸 깨달았다. 강의를 준비하면서 볼일을 보던 중이었다. 그때 루터는 “가장 미워했던 로마서 1장17절(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의로움이 믿음에서 믿음으로 계시된다. 이는 성경에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산다’고 기록된 바와 같다)이 가장 사랑하는 구절이 됐다. 내게 천국의 문이 됐다”고 고백했다. 일종의 ‘오도송(悟道頌·깨달음의 노래)’이다.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루터의 모토는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산다”는 바울의 오도송과도 통했다.
사람들은 묻는다. 심약한 성격의 루터가 어떻게 교황청을 상대로 반박하고, 논쟁하고, 싸우며 종교개혁을 이끌었을까. 그 힘의 바탕이 그리스도의 체험, 말씀에 대한 체험이었다.
◆루터의 대자보, 종교사를 바꾸다=면죄부 판매와 함께 고해성사를 하는 사람들이 줄었다. 루터도 이 문제와 직면했다. 비텐베르그에서는 면죄부가 판매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웃 도시로 가서 면죄부를 구입했다. 그리고 더 이상 고해성사를 하지 않았다. 루터는 고민에 빠졌다.



작은 도시인 비텐베르크로 갔다. 당시 루터는 면죄부 등에 의문을 품고 “신학적인 토론이나 해보자”며 ‘95개 논제’를 써 붙였다. 비텐베르크 교회 외벽에는 루터가 내세웠던 ‘95개 논제’가 새겨져 있다. 일종의 대자보다.
루터의 논제는 인쇄술 혁명에 힘입어 순식간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각국 언어로 번역됐다. 파장이 커졌다. 논쟁은 1517년부터 5년간 계속됐다. 결국 루터는 교황청으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루터는 파문 칙서를 비텐베르크 참나무 아래서 불태워버렸다. 지금도 그곳에는 ‘루터의 참나무’가 서 있었다.
◆지금도 울리는 루터의 외침=많은 이가 파문된 루터의 목숨을 노렸다. 루터는 아이제나흐의 바르트부르크 성(城)으로 숨었다. 삭소니 지방의 제후가 그를 도왔다. 그 성을 찾아갔다. 높다란 계단을 올라가니 루터가 머물던 방이 있었다.
기사로 위장한 루터는 이곳에 숨어서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성직자·귀족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했다. 방에는 바짝 마른 루터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 속에서 기사로 가장한 채 수염을 길렀던 루터다.
안내를 맡은 신국일(프랑크푸르트 슈발바흐 성령교회 담임) 목사는 “루터판 성경은 고어체라서 읽기 힘들다. 그런데 지금도 독일인은 루터판 성경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다. “예수로 돌아가자. 말씀으로 돌아가자.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루터의 외침 때문이 아닐까. 결국 유럽은 구교와 신교의 전쟁을 거친 뒤 종교개혁의 열매를 맺었다. 그렇게 루터는 세계사를 바꾸어 놓았다.
루터의 외침은 지금도 유효하다. 금권 선거와 정치 공방, 교회 세습과 정당화, 목회자의 성 추문, 교회 내 이권다툼 등으로 얼룩진 일부 교회들은 그 외침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지 않을까. “예수로 돌아가자. 말씀으로 돌아가자.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500년 전 루터의 외침을 향해서 말이다. 백성호 기자

◆면죄부=가톨릭에선 ‘면죄부’란 용어 대신 ‘면벌부’ 혹은 ‘대사부(大赦符)’란 표현을 쓴다. 죄를 면해 주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벌을 면해준다는 뜻이다. 가톨릭에선 죄를 사하는 유일한 방법은 고해성사라고 본다. 중세의 설교가들은 교회 사업의 모금을 위해 면벌부를 남발했다. 왼쪽 작은 사진은 면죄부 헌금함.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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