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이민 다큐멘터리-26·마지막회] 이민생활에 얽힌 얘기들4
'한국 처녀' 거의 없어…2세들 결혼 하기도 어려워져
100번 이상 이사한 경우도
고국 그리도 가길 원했는데…
자식들 두고 갈 수 없어 포기
▶농장 옮기다 이삿짐도 안 풀어
멕시코 이민들은 이 농장 저 농장으로 방황하는 시기를 보냈다. 작업 조건도 나빴고 임금도 낮았기 때문에 조금만 나은 곳이라면 그 농장으로 옮겼다. 그때 100번도 더 옮겼다고 얘기하는 동포들도 있었다. 뻔질나게 이사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현오목 할머니의 얘기다.
"농장 많아요 유카단 반도에. 가서 석달도 있고 여섯달도 있고 여덟달도 있고두달도 있고…. 오래 있지 않아요. 또 조금만 틀리면 딴 농장으로 가고 조금만 틀리면 딴 농장으로 가고…. 어떻게나 많은 농장을 다녔는지 짐싸는 궤짝을 아예 예비해 놓으셨어요. 또 동아 매는 줄도 예비 해놓으시고…. 그렇게 세월을 보내셨어요."
▶이젠 아들 딸 때문에 고국 못가
비행기 한번 타면 돌아올 수 있는 최근의 미국 이민들도 고국을 그리워한다. 집밖에 나가면 10분도 못돼서 한국사람을 만날 수 있는데도 그들은 모국이 그리워우는 때가 많다. 하물며 초기 이민들이 고국에 돌아가기를 얼마나 원했느냐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LA에서 살고 있는 김 마리아 할머니의 얘기다.
"우리 어머님부터도 밤낮 가시겠다고 밤낮 가시겠다고 하셨죠. 성님 한 분 계시고 우리 할아버지가 계시니까 가시겠다고 했는데 일본 사람들 때문에 못 가셨지요. 한국이 그렇게 된 뒤에 제가 시집을 갔고 또 동생도 시집을 갔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이번에는 자식을 두고 갈 수가 없게 됐죠. 결국 못 가고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의 말씀이 내가 한국에 가서 물 한 그릇이라도 이렇게 떠먹고 죽었으면 원이 없겠다. 밤낮 그렇게 원하셨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는데 어떻게 해요."
▶조국 사랑 자식에게 말로 풀어
초기의 아메리카 이민들은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는 서러움을 자식들에게 말로 풀어 나갔다. 한국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면 모두 다 얘기 해줬다. 10번도 더 했고 20번도 더 했다. 그 동안에 많이 가꾸어져서 미화되기도 했지만 동화처럼 얘기해 줬다. 그래서 2세 동포들은 가 본 일도 없는 한국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현오목 할머니의 얘기다.
"얘기를 어떻게나 많이 들었는지 가본듯 해요. 밤낮 앉으시면 한국얘기 한국은 어떻고 어떻고…. 사는 얘기 잡수시는 얘기 과일이 어떻고 춥고 덥고 별얘기를 다하셔요. 그래 우리 어머니께서는 그러시더군요 여기는 자식 기를 데는 아니다. 한국에서는 교육을 참 잘 시킨다. 그런데 여기는 자손들을 교육시킬 수가 없다고 그렇게 얘기하시더군요."
▶인종차별에 한인 짝짓기도 어려워
하와이 이민 2세들은 어떤 의미에서 그들의 부모보다 더 서러움을 당했다. 부모들은 어차피 사탕수수농장의 노동자였다. 그래서 어떠한 서러움도 서러움으로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2세들은 모두 다 교육을 받은 훌륭한 성인이었으며 당당한 미국 시민권자였다. 그런데도 인종차별 때문에 직장을 갖지 못했다. 결혼하기도 어려웠다. 백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남자들의 경우는 더구나 한국인 2세 여자들이 많았던 것도 아니었다.
미국에서 멕시코로 건너가 살고 있는 김수권 할아버지의 얘기다.
"한국 양반들이 이민 올 때 부인 데리고 오신 분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내가 23살 됐을 때 한국 처녀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캘리포니아에서 한국여자하고 결혼을 하려면 말입니다 잘나기를 영화배우 같아야되고 부자이기를 백만 장자여야 되고…. 허지만 뭐 내가 가진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러니 한국 여자와는 얘기도 못하고 그렇다고 미국 여자와도 말을 건네지 못하고…. 그러므로 간혹 흑인여자들과 함께 놀러 다닌 일이 있었습니다."
▶한평생 식당 운영 독립에 전력 다해
아메리카의 초기 이민들을 취재하면서 기자는 그들이 뭣 때문에 그처럼 애국적이었는지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라를 잃었다는 생각 그 때문에 서러움을 받고 있다는 생각 가고 싶은 고국에 대한 생각 그러나 어떤 것으로도 납득할 만한 설명이 되지는 못했다.
그들의 생활은 모두가 남을 위해서 살았던 것뿐이었다. 국가를 위해서 독립운동을 했던 애국지사를 위해서 그리고 내 동포를 위해서 살아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살고 있는 양주은씨는 40년 동안을 그곳에서 식당을 경영해왔다. 지금 같으면 많은 돈을 벌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돈을 모두 남을 위해 썼다.
"식당 사업을 40년을 했어요. 식당사업을 해야 한국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게되고 돈도 벌어야 독립운동에 쓸 수 있고 애국지사들이 오면 식사할 수 있도록 하고…. 해방 후에는 군인들까지 한인 인사들에게는 무료로 서비스를 했어요. 또 유학생들이 뉴욕이나 시카고로 갈 때 그 사람들 영어 한마디 못할 때이니까 점심 도시락을 싸서 주면서 너희들 물만 먹어라. 차에 들어가면 커피 값이10전 또는 20전씩이다. 그러니 싸준 샌드위치에다 물만 마셔라. 그래도 죽지는 않으니까 걱정 마라 그렇게 보내기도 했습니다."
▶멕시코한인중 3백여명 쿠바 이주
멕시코로 떠났던 초기 이민들 중에서 상당수가 쿠바의 사탕수수농장으로 옮겼다.
몇 명이 갔느냐는 정확한 기록은 없다. 3백여명이라는 것이 입으로 전해지는 숫자다. 그들은 멕시코에 남아있었던 초기 이민들보다는 훨씬 많은 보수를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래서 쉽게 성공한 사람들도 많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쿠바의 공산화 이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부분이 생활이 안정돼 소위 그들이 말하는 부르주아적 계급이 됐기 때문이다. 지금 몇 명이 그곳에 있는지도 모른다. 상당수의 한국계 동포들이 있다는 것만 알려지고 있다.
로스앤젤레스의 김 마리아 할머니는 쿠바에서 왔다. 김 할머니도 쿠바의 한인들에 관해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쿠바에는 정신적인 안식처인 교회도 없었다고 얘기했다.
"아이들더러 선생님들이 그럽니다. 하나님 뭐 어쩌고 그러면 하나님더러 달라고 그래라. 옷 달라고 하고 먹을 것 달라고 해라 어디 주나 봐라 그이는 안 준다. 그러나 피델 카스트로 한테 달라면 옷도 주고 먹을 것도 주고 너 공부도 시켜주고 그런다. 결국 하나님을 믿지 말자는 그 말이죠."
정리= 천문권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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