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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이민 다큐멘터리-25] 이민생활에 얽힌 얘기들 (3)

박용만의 군사학교, 이승만 반대로 2년만에 해체

▶대 조선국민군단 창설 3백여 한인생도 참가

하와이에 우리의 군사학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1914년에 하와이에는 한국 사람들만을 생도로 하는 군사학교가 설립됐었다. 물론 교관도 교장도 한국사람이었다. 생도들도 무려 3백여명이나 됐었다.

"박용만 이라는 사람이 미국 본토에서 왔었습니다. 그이가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여기 와서 군단을 조직했었습니다. 여기 정부의 허가를 받아 가지고 말입니다. 한인들이 제일 막강했던 때가 그때였습니다. 그 분이 큰 농장의 사탕수수밭을 맡아 가지고 한인들을 그 사탕수수밭에서 일하게 하고 일이 끝나면 나와서는 군복을 입고 훈련을 받고…. 그렇게 열심히 했었죠."

증언해 준 하와이 2세 동포인 당시 79살 김성수 할아버지의 얘기 가운데 박용만이 사관학교 출신이라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그러나 박용만의 국민군단 활동은 '조선 독립운동사'에도 기록돼 있다.

▶일하면서 훈련받고 이론까지 배워

'대 조선 국민군단'이라고 불리는 이 군단은 1914년 8월 29일에 창설돼서 1916년까지 계속됐다. 국민군단의 생도들은 들판에서 훈련을 했고 군사학교에서 군사학을 배웠다. 그리고 교대로 사탕수수농장과 파인애플 농장에 나가서 노동을 했다. 기록을 보면 카키색 군복을 입었고 목총을 어깨에 매고 행진했다고 돼 있다.

당시의 하와이군 사령부도 국민군단의 활동만은 묵인해 줬다.

박용만이 군대를 양성했던 것은 물론 독립을 위해서였다. 그는 그곳에서 인재를 양성해서 독립군 편성에 도움을 주자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국민군단은 2년 뒤인 1916년 10월 이승만의 반대로 깨지고 말았다. 그때 대 조선 국민군단은 해산됐다.

▶초기이민 모두는 오직 나라만을 생각하는 사람들

아메리카 초기 이민들이 국가를 생각했던 것과 최근 이민들의 생각을 비교해 보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하와이 그리스도 연합 감리교회 박대희 목사의 얘기다.

"그 당시의 분들은 좀 단순하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일편 단심이랄까… 나라를 잃어서는 안된다든지 나라를 되찾아야겠다든지 정말 단순히 그 생각 밖에는 없었던 것 같아요. 또 애국자들이 여기 많이 와서 그 지도자들이 그런 면으로 지도를 했습니다. 요새는 TV도 있고 영화도 있고…. 그래서 여러 가지 세상의 잡념을 가져다가 넣어 줄 만한 것들이 많지만 그때는 그런 것들이 전혀 없었고 그 대신 그런 연사들이 조국애를 부르짖고 말이죠…. 그러니깐 자기네들이 먹을 것 못 먹고 입을 것 못 입으면서도 다 돈들을 내서 애국운동들을 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때하고 지금하고 사람들이 좀 달라진 것이 아닌가 생각이 돼요. 우선 저부터도 그렇습니다만 요즘 사람들은 많이 배워서 너무 알고 그러기 때문에 좀 이기적이 된 것 같아요."

▶1948년 하와이서 한인 라디오 시작

1977년 당시 미국의 로스앤젤레스에는 24시간 한국어로 방송되는 KBC(대표 서정자.관련기사 14면 )라는 한국어 방송이 있었다.특수 채널을 통한 방송이어서 특별히 제작된 라디오가 있어야만 청취할 수 있기 때문에 대중성은 없었다. 그러나 이 방송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모든 프로그램을 한국어로 방송한 최초의 한인 방송이었다.

당시 우리 이민들은 AM과 FM등 미국의 방송회사들로부터 1시간 혹은 2시간씩을 빌려서 방송을 해왔다. 이런 방송은 한국인이 많이 모인 곳이면 어느 곳이건 대부분 있었다.

미국에서 제일 먼저 이런 식으로 방송을 시작한 곳이 하와이다. 1948년 2월13일 오후 3시30분에 첫 방송이 나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동포 방송계에서 직접 또는 간접으로 일해왔던 전 하와이대학교 이상억 교수로부터 당시의 얘기를 들어본다.

"동리마다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모여 가지고 방송이 오후 3시 반에 나오는데 아침부터 와서 라디오를 틀어 놓고 아들 딸들에게 다이얼을 맞춰달라고 하면서 거기에서 점심을 다 같이 해 잡수고 그리고 들었다는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또 6.25때는 전쟁의 참혹한 상황을 제가 한국말로 보도 할 때에 그 분들이 눈물을 흘려 가면서 듣고 그리고 앞길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함께 걱정하곤 했습니다."

이교수가 직접 진행했던 이 방송은 일주일에 단 한차례 30분 짜리 방송이었다.

그 주간의 뉴스와 2-3개의 음악 한국어 교실 그리고 한국에서 방문한 사람이 있을 경우 인터뷰도 포함시켰다. 이 방송은 그 뒤 10년 동안 계속됐다. 이 교수는 30분짜리 한번 방송에 36달러를 송출료로 냈다고 밝혔다. 지금이야 36달러는 돈이 아닐 정도이지만 당시는 큰돈이었고 결국은 그 돈이 마련되지 않아 중단하게 됐다는 설명이었다.

▶2차 대전 때 한인 중엔 일본인 감시 임무도

2차 대전 중에 미국에 있는 일본 이민들은 적국의 국민 취급을 받았다. 집단 수용을 당했고 항상 감시의 대상이었다. 김성수 할아버지는 그때 자기에게 일본 노무자들을 감시하는 특권이 부여됐었다고 얘기했다.

"나부터도 농장에 있었지만 마치 정탐꾼 모양으로 표를 만들어 주고 일본사람들의 집집을 댕기면서 뭐하나 알아보고 또 검사해 보라고 내게 아주 권리를 주었었습니다. 농장에 있으면서도 말입니다."

▶"너희 아들딸은 우리농장 태생이니 우리 노예다"

1905년 멕시코로 건너간 초기 이민들은 4년 기간의 노동계약을 체결했었다. 4년 뒤에는 충분한 돈을 받고 다시 배에 태워서 되돌려 보내기로 돼 있었다. 물론 돈도 받지 못했고 돌아갈 배도 내주지 않았다.

어떤 곳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1909년에 한인들의 노동계약이 다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가겠다. 이제는 돈을 달라. 그렇지만 완전히 우리 나라의 국권이 상실되고 일본 사람들의 속국으로 있게 되니까 결국은 정당한 보수도 받지 못하고 또 심지어 어떤 농장주인들은 너희들의 자녀는 우리 농장에서 일하는 동안에 낳았으니까 우리의 노예다. 그러니 아이들은 놔두고 너희들은 몸만 나가라. 이런 비인도적인 그런 농장주인들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사실입니다."

로스앤젤레스 우상범 목사의 설명이다. 우 목사의 얘기는 사실이었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농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들고 일어섰고 또 공인될만한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리=천문권 기자 cmkn@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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