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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이민 다큐멘터리-24] 이민생활에 얽힌 얘기들 (2)

13세 꼬마 아가씨, 16세로 속여 사진결혼 성공

▶'통변'되면 일도 않고 특별대우

아메리카의 초기 이민들이 겪어야 했던 또 하나의 고통은 언어의 장벽이었다. 비록 농장에서 일을 했지만 시키는 일이 무엇인지는 알아야만 했다. 알아듣질 못해서 엉뚱한 일을 했고 그 때문에 채찍질을 당한 일도 있었다.

이런 일은 맞은 사람도 억울한 일이었지만 일을 시켜야만했던 농장주인들의 입장에서도 답답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통역하는 사람을 필요로 했다. 당시에는 통역하는 사람을 '통변'이라고 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살고 있는 양주은옹의 얘기다.



"누가 영어를 좀 할 수 있는가 하고 찾았어요. 그 가운데는 배재학당에서 영어를 한 사람이 있었어요. 그러면 그 사람을 지정해서 통역을 하도록 하지요. 그 사람은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집에서 자유롭게 있다가 문제가 생기면 불러다가 농장주인과 한인들 사이의 통역을 해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통역으로 한몫을 한 셈이죠."

통변에 얽힌 얘기는 많다.

어떤 통변은 농장주인의 편에 서서 초기 이민들을 괴롭힌 일도 있었다. 어떤 통변은 농장주인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치면서 욕설부터 알려 준 사람도 있었다.

멕시코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다른 사람은 다 나가서 점호를 하는데 자기는 안 나가고 있으니까 점호를 해보니 당연히 한사람이 없었겠죠. 멕시코인 관리자가 누가 안 나왔냐? 하니까 아무개가 안나왔다고 대답을 했고 이어 왜 안 나왔느냐? 고 물었지만 별 이유가 있을 리 없죠. 그러자 잡아와라 그래서 숙소에 가서 붙잡아 가지고 옷까지 벗긴 다음에 전체 앞에 세워두었습니다. 물론 때리려고 말입니다. 그 사람은 맞을 것을 각오하고 앞으로 나가면서 혼잣말로 그러나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목청을 돋구어 '때리기만 하면 너죽어!'라고 말했답니다. 그러자 통역하는 사람더러 이 사람이 뭐라고 했냐고 물었고 통역은 사실 그대로 만일에 때리면 너를 죽이겠다고 그랬다고 했더니 겁이 났던지 때리지 않았다고 얘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잔돈 셀줄 몰라 모두 꺼내놔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1년 정도만 지나면 대략이지만 일하는 요령을 알게 된다.

그리고 쉽게 그 방면의 언어도 구사 할 수 있다. 그러나 농장밖에 나가면 아무것도 통하질 않았다. 그들은 생활의 기초인 숫자 마저 헤아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또 많은 손해를 봤다.

"아버지는 일 가시고 어머니는 식료품을 사야겠는데 말을 모르시니까 뭐든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손짓으로 이것을 달라 저것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보이는 것은 그렇게 살 수가 있었는데 보이지 않는 것은 방도가 없죠. 한번은 달걀을 사야겠는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거기에는 없어서 서성대니까 그 사람들이 뭐냐고 자꾸 자꾸 묻더래요. 할 수 없이 닭모습을 하면서 '꼬끼오~'했더니 그 사람들이 알아차리고 주더래요. 고생 많이 하셨어요 말을 못해서…. 돈을 줄 때도 가진 돈을 모두 꺼내 놓으면 더 받는지 덜 받는지 그것도 모르고 남으면 도로 가져가시고 안 남으면 그것이 다 내가 물건을 산 것이려니 생각하고는 그냥 나오셨습니다. 그러니 돈도 많이 잃어 버렸을 겁니다. 그 사람들이 모두다 착한 사람들만은 아니었을테니 말입니다."

▶13살 소녀 나이 속여 사진 결혼

미국으로 건너간 초기 이민들이 사진 결혼을 했다는 얘기를 한 일이 있다. 당시에 사진 결혼으로 들어간 신부들의 나이는 20살 안팎이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13살의 나이로 결혼하겠다고 나선 꼬마 아가씨가 있었다. 이민국에서 허가 해 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 꼬마 아가씨는 통과됐다. 그분이 바로 자기 어머니였다고 77년 당시 65살 제인 이 할머니가 소개한다.

"우리 어머니가 13살 때 시집을 왔어요. 배에서 내리는데 13살이면 안된다고 해서 16살이라고 거짓말을 하셨대요. 우리아버지와 어머니의 나이는 20살 차이였습니다."

33살의 노총각이 13살의 꼬마 신부를 맞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도 못한 홀아비들이 하와이 농장에는 많았다. 신부를 데려오는데 필요한 2백달러가 없었던 것도 이유였지만 그보다는 미국정부의 금지조치 때문이었다. 그리고 쉽사리 미국으로 이민오겠다는 신부가 많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었다. 이유야 어떻든 남들은 그렇게라도 해서 장가를 들었는데 홀아비로 한평생을 지내야만 했던 그 사람들의 실망은 대단했을 것이다.

▶늙은 신랑 죽으면 신부는 내 차지!

사진 혼인으로 미국에 건너온 이순도 할머니의 얘기다.

"독신생활 하는 사람들은 일하고 돌아오면 할 일이 없죠. 그렇게 할 일없는 독신자들이 풀밭에 죽 늘어앉아서 하는 얘기가 그것이예요. 우리가 사진혼인을 하려고 애쓸 것 없이 한 10년 있으면 저 사람들 다 죽을 테니까 그때가 되면 자연히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고 그랬습니다. 그때 나는 그랬습니다. 방에 들어가서 거울이 없으면 물이라도 떠놓고 자기 얼굴들이나 쳐다보시지. 자기들은 늙지 않고 죽지 않겠는가?"

나이 많은 신랑이 죽으면 젊은 신부는 내가 차지하겠다는 얘기는 정말 익살스런 표현이다. '익살스럽다'는 것은 그들에게 애정에 얽힌 탈선이 없었다는 데서 연유된다.

아메리카 이민사회에서 홀아비와 유부녀가 탈선했다는 기록은 찾아 볼 수가 없다. 1세나 2세 동포들도 그 점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돈 안 보낸다' … 한국과 소식 끊겨

하와이나 멕시코의 농장에서 노동을 했던 초기 이민들이 본국과 전혀 단절된 상태에서 지낸 것은 아니었다.

성경과 찬송가는 본국 교회에서 지원을 받았었다. 1세들 중에는 신문이나 잡지등 간행물도 받았다고 얘기하는 분들도 있었다.

멕시코의 어떤 동포 2세는 큰아버지로부터 귀국하라는 편지와 돈까지 받았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가슴 아픈 일도 있다. 어저귀 밭에서 노예와 같은 중노동을 하면서도 돈이 없어서 못 돌아가는 사람에게 돈을 보내 달라는 편지가 있었다.

멕시코 티후아나에 살고 있었던 현오목 할머니의 회고다.

"우리 아버지가 가난해서 양복 하나가 없어서 사위의 옷을 빌려서 입으시고 그리고 아이들 옷을 하나씩 해서 입힌 뒤에 식구 전체가 사진을 찍었어요. 그 사진 여태 있습니다. 그 사진을 한국에 있는 형제들에게 보냈더니 잘 사는 줄 알고 돈을 보내라고 그랬대요. 그래 기가 막혀서 우리도 먹고 살 수가 없는데 무슨 돈을 보내겠느냐고 편지를 했더니 돈을 안 보냈다고 그 뒤부터는 연락을 해오지 않아 연락이 끊겼습니다."

현할머니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물론 돌아가셨다. 지금까지 편지가 없다. 돌아가셨는지는 모르지만 한국 어딘가에 현 할머니의 사촌들이 살고 있을 것이다. 서로의 사정을 몰랐기 때문에 빚어진 오해였을 것이다.

정리=천문권 기자 cmkn@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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