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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몽매해 나라 뺏겼다는 설움에 한인들 자녀교육은 사명이었죠"

이덕희 이민사 연구가

“이민 선조들의 자녀교육이라는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게 아니었습니다. 국민이 무지몽매해서 나라를 잃었다는 생각에 배워야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라는 각오이자 사명이었습니다.”

지난달 24일 하와이 한인회관에서 만난 이민사 연구가 이덕희(사진) 하와이대 한국학센터 연구위원이 말한다.

그는 올해로 70세지만 여전히 바쁜 이민사 연구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이화여대 재학시절인 1968년 도시계획 전문가가 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유학길에 오르면서 이민 생활을 시작했다.



하와이 생활은 유학 시절 일본계 3세인 남편을 만나면서부터다.

한인 이민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호놀룰루시와 하와이 주정부에서 도시계획을 담당했던 공무원 재직시절.

“도시계획을 하다 보니 다른 민족들이 이민역사를 기념하는 것을 보게 됐어요. 자연히 한인 이민사에도 관심을 갖게 됐죠.”

그는 ‘하와이 이민 100년 그들은 어떻게 살았나’, ‘하와이 동포의 한국 사회에 대한 기여’등의 저술을 주도하고 ‘한인기독교회 한인기독학원 대한인동지회’등 다수의 이민사 관련 책을 저술했다.

한인 이민 100주년 행사도 일선에서 진두 지휘했던 그는 부녀회의 활약을 강조했다.

“1924년에 일본 사진신부들 틈에 껴 한인 사진신부 700명 정도가 오면서 부녀회는 1500명 정도로 시작됐어요. 반면 일본 부녀회는 2만 여명이나 됐지만 그룹 활동이 없었어요. 한인 부녀들은 교육회, 구제회, 영남 부인회 등 여러 개의 그룹을 조직했어요. 우리는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으니까요.”

그는 초기 이민자들은 깨어있는 지식인들이었다고 강조했다.

“우리 생각에 100년 전에 영어도 못하고 제대로 교육도 못 받은 사람들이 먹고 살기만 했으리라 생각 한다면 착각이에요. 지금의 우리보다 현명했고 나라를 위한 사랑이 있었고요. 1905년부터 신문을 발행했으니 당시 의식을 가늠해 볼 수 있지 않나요?”

요즘의 한인단체들이 자발적인 자금모금보다는 한국 정부 등 다른 곳에 손을 벌리려는 태도가 있다며 지적했다.

“인구 4500명 정도에서 애들 빼고 노동 인구는 2000명도 안 되는 숫자였어요. 그 땐 이미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상태라 돌아갈 희망이 없었고요. 다른 사람 도움 없이 우리 손으로 회관을 지었습니다.”

이 연구가는 앞으로 다가올 110주년, 나아가 200주년을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110년 전과 지금 한국의 위상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경제 강국으로써 세계 주도를 해 나가는데 미주 한인 후손들이 어떻게 동참하느냐를 모색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그는 “한민족에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글로벌 시티즌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조국에 보훈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며 “재난으로 고통 당하는 일본을 돕기 위해 한국의 젊은이들이 성금을 내는 것을 보면서 뿌듯했다”고 했다.

차세대들에게는 한인 동포사회에 머물지 말고 과감하게 주류 사회를 뚫고 경험과 인맥을 넓히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다 역설했다.

“변호사가 됐다면 개인 사무실 개업보다는 큰 로펌이나 검사실에서 시작해서 어떻게 돌아가는지 배워야 합니다. 비즈니스도 마찬가지로 운영을 잘하는 식당에서 밑바닥부터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해요. 의사도 큰 병원에 적을 두고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이성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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