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미주 독립운동 현장을 가다-하와이 (상)]"사탕수수밭서 피땀어린 돈 한두 푼 모아, 이역만리 조국 독립운동자금으로 바쳐"

이민 역사 1세기가 흐른 하와이 동포사회는 4만 5000여명의 한인 인구가 전체의 2%에도 못 미치는 소수 민족이지만 주대법원장, 주하원의원, 빅아일랜드 시장, 연방 판사, 호놀룰루 경찰국장 등 각계각층의 요직 인물을 배출해내며 ‘코리안 파워’를 입증했다. 첫 근대적 이민지이자 해외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하와이.

이제 이곳 동포사회는 역사적 뿌리와 자부심을 바탕으로 새로운 도약의 110주년을 준비하고 있었다.

부녀들, 독립자금 모금·자녀교육 열성

◇호놀룰루항에 첫 발을 떼다



와이키키 해변에서 북서쪽으로 약 4마일 거리에 있는 호놀룰루 항구. 햇볕이 내려 쬐는 가운데 부슬비가 내렸다.

‘호랑이가 장가를 가도 몇 번은 가겠군…’생각이 들 무렵 “비가 와도 바로 햇볕이 나는 이 날씨가 하와이의 매력”이라며 항구 안내원이 인사를 건넨다.

호놀룰루의 상징적 시계탑인 알로하 타워를 지나자 펼쳐진 호놀룰루 항구 전경.

최초의 한인 이민자들이 미국 땅에 첫 발을 디딘 바로 장소다.

한인 이민자들은 1902년 12월 22일 인천 제물포를 출발해 일본 나가사키에 들러 신체검사를 받고 이중 102명이 갤릭호에 몸을 실었다.

보건 당국 심사를 통해 상륙허가를 받은 86명은 이 곳에서 기차를 타고 와이아루아(Waialua)농장과 모쿨레이아(Mokuleia)캠프로 이동했다.

본격적인 근대적 첫 이민은 그렇게 시작됐다.

◇“선조들 눈물 뿌린 사탕수수밭이 있었기에…”

오아후섬 북쪽 끝자락에 있는 폴리네이시안 민속촌에서 83번 도로 서쪽방면을 따라 99번 도로 남쪽방면을 타고 내려오는 길 양 옆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커피농장이 펼쳐진다.

더위를 식힐 만한 큰 나무 한 그루 조차 보이지 않는 이 대지가 지금은 사라진 사탕수수밭 자리다.

남미나 필리핀 등 가격이 저렴한 곳에서 수입하면서 사탕수수 농사는 과거의 한 페이지가 돼버렸다. 그나마 파인애플 농장은 곳곳에 남아 있었다.

“선조들의 피눈물이 베어 있는 곳이에요. 조국 떠난 그리움과 나라 잃은 설움에도 새벽부터 저녁까지 가장 적은 품삯을 받아가며 그 힘든 노동을 했었죠.”

동행한 한인 가이드의 말이다.

1910년 4500여명에 이르던 한인들은 고달픈 노동과 가난에도 불구하고 3000만 겨레를 돕기 위해 한 푼이라도 독립운동자금에 보태려고 했다.

하와이 이민사 전문가들에 따르면 1909년부터 1920년까지 하와이 국민회가 모은 독립자금은 300만 달러가 넘었다.

대부분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송금됐다.

동포들의 국권회복 운동에는 부녀들의 활약도 컸다.

이 중 상당수는 1910년부터 1924년까지 남편의 사진 한 장 보고 태평양을 건너 시집 온 약 800명의 이른바 사진신부들이었다.

“이런 이야기도 있어요. 남편 여권 사진 한 장 보고 시집 온 10대 새 신부가 공항에 마중 나온 남편을 보고 시아버지라고 착각을 했대요. 실제로 나이차이도 10~20년씩 나는 것은 예사였고요. 나중에 남편이란 걸 알게 된 새 신부가 밤새 울었다는 이야기는 많아요. 그래도 한국 여성들 대단합니다. 남편 뒷바라지 하고 자원봉사 하면서 독립자금 모으고, 자녀 교육에는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요. 그런 선조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전 국민회관 '독립문화원' 주민 반발에 정상 운영 어려워

◇하와이에 펄럭이는 태극기, 한국독립문화원

호놀룰루 시내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루크 애비뉴 언덕배기에 자리잡은 한국독립문화원.

건물 앞 국기게양대에 달린 태극기와 성조기는 세찬 바람에 펄럭펄럭 힘차게 휘날리고 있었다.

“미리 연락을 주셨으면 좋았을 걸요. 주택가라 주민들 반대가 심해서 정상 운영이 힘든 상황이거든요.”

문화원의 한미라 총무가 전화 너머로 아쉬워했다.

이 곳은 해외 독립운동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국민회가 1947년 회관을 옮겨 사용했던 한인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역사지다.

국민회는 1914년 건립한 밀러스트리트의 회관이 주지사 관저가 확장되면서 헐리게 되면서 이 곳으로 터전을 옮겼다.

문화원에 따르면 1990년대 들어 국민회가 건물 유지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 한국 정부에 회관 기증을 제안하지만 IMF위기로 인한 사정으로 회관을 인수하지 못했다.

이 때 현재 문화원 이사장인 한국의 홍우준 경민학원 설립자가 2001년 국민회관을 인수, 이민 100주년을 맞은 2003년 1월 14일 한국독립기념관을 개관했다.

1980년 연방정부와 하와이 주정부에 역사보존지로 등록되기도 했다.

기자는 다음 날에야 문화원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문화원 안에는 독립운동 시절 당시 국민회가 사용했던 테이블과 의자 등에서부터 독립운동 전개, 하와이 이민 생활 등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수 백여 장의 사진들이 진열돼 있었다.

초기 이민자들이 사용했던 재봉틀과 피아노 등도 눈에 띄었다.

한 총무는 “홍우준 박사께서 민족교육은 제2의 독립운동이라는 교육 이념으로 이 회관을 인수했는데 주민들의 반발과 운영비용 등 정상 운영에 어려운 점도 많다”며 “해외 독립운동사의 보고가 될 수 있는 이곳이 방치되지 않도록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뒤뜰에 세워진 무명애국지사 추모비에는 ‘망국의 한을 품고 하와이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수입의 십일조 등을 바치며 온 충성을 다하다가 눈을 감으신 무명의 애국지사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여기 추모비를 세운다’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사탕수수밭에서 피땀으로 얼룩진 생황을 하면서도 조국 독립을 위해 충성한 한인 동포들을 기리는 겁니다.”

이승만, 100년전에 세계정세 꿰뚫어

◇이승만이 세운 한인기독교회

호놀룰루 릴리하 스트리트 139번지. 하와이와 빼놓을 수 없는 인연인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1918년 세운 한인기독교회 모습이 드러났다.

파란 기와지붕과 이승만 동상이 가장 먼저 눈을 사로 잡았다.

“지난주 일요일(3월 20일) 이승만 대통령 탄신일을 기념해서 교회 신도들과 동지회 회원들이 행사를 열기도 했습니다.”

하와이대 한국학센터의 이덕희 연구위원인 이덕희 이민사 연구가는 "이승만의 동지회가 국민회와 갈등도 있었지만 같은 목적 아래 접근 방법이 달랐던 것뿐"이라고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회가 교민단으로 개편된 지 4개월 후인 7월 7일 대한인동지회를 조직했다.

국민회 주도권을 놓고 박용만과의 갈등도 주요 원인 중 하나.

동지회는 상하이 임시 정부를 옹호하고 외교주의론을 기본 노선으로 열강의 동의를 얻어 독립을 앞당기려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저 역시 4.19세대고 이승만 독재정권에 반대했던 사람이었어요. 연구를 하면서 알게 된 건데, 이승만 대통령이 성격적으로 고집스러운 데가 있었지만 100년 전에 세계정세 국제관계를 훤히 뚫고 인물입니다. 하와이 동포 사회의 분열과 갈등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잘못한 것은 지적하되 잘한 업적은 제대로 알자는 겁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은=신문산업의 발전과 지원을 목적으로 설립된 공공기관으로, 한국언론재단·신문발전위원회·신문 유통원이 통합되어 2010년 2월 공식 출범했다. 2009년 7월 31일 개정된 '신문 등의 진흥에 관한 법률' 제29조를 근거로 설립된 공공기관으로, 신문 및 인터넷신문의 건전한 발전과 읽기 문화 확산, 신문산업의 진흥을 목적으로 한다. 최근 해외언론지원사업 대상으로 워싱턴 중앙일보 등을 지정, 기획취재 등을 후원하고 있다.

호놀룰루=이성은 기자

협찬: 한국언론진흥재단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