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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마당] 연초록

이영숙/중앙신인문학상 논픽션 부문 입상

윌셔길을 걸었다. 다운타운 가까운 윌셔길. 어느 틈에 내 곁에 와 있는 이른 봄과 함께 잠시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고 싶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었다. 나지막한 언덕위에 높은 아파트가 지어져 있다. 작은 언덕배기에는 담쟁이가 가득히 피었다.

언덕을 기어올랐을 모습. 문득 인간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담을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 담쟁이를 노래한 도종환 시인이 생각난다. 그들의 끈기와 인내와 이기고 말겠다는 용기를 인간들에게 가르치는 담쟁이를 아름답게 표현했다. 강하게 담대하게 오른 모습을 그렸다. 장한 담쟁이들.

담쟁이를 헤쳐 보면 분명 그 속에는 흙이 가득할 것이다. 그들이 덮고 있는 그 속을 나는 헤쳐보고 싶다. 쓰레기도 있을 수 있다. 흙속에는 벌레들이 집을 짓고 숨어 있을 수도 있겠지. 어쩌면 내가 징그럽다고 가장 싫어하는 지렁이가 우글거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모양이 얼마나 아름답고 깨끗한지 모른다. 아래에 있는 모든 허물들을 덮고 있는 모습이 좋다. 남의 허물을 끄집어내고 들춰내는 이 세상에서. 아니 있지도 않는 허물까지 만드는 각박한 세상에서 덮어주는 모습이 고맙다.



같은 모양의 다른 크기. 제법 커다란 잎사귀는 내 손바닥만 하다. 그러나 막 피어난 순은 정말 아기손 마냥 자그마한 것이 귀엽기 그지없다. 크기만 다른 게 아니다. 색깔 또한 다르다. 아직 행인들의 코트가 두껍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봄이 가까이 왔나보다. 짙은 녹색과 함께 자리한 연 초록이 참 곱다.

짙은 녹색들은 이 추운 겨울을 잘도 넘겨왔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을 이겨낸 모습이 늠름하다. 검푸르게 당당한 모습으로 이겨온 그 날들을 자기를 지켜보는 모든 이들에게 담담히 알리고 있다. 어쩌면 힘들고 지쳐서 그냥 시들어버릴 수도 있었을 그 날들을 이렇게 이겨냈다. 추운 겨울을 잘 이겨내고 새 봄을 맞는 짙은 녹색의 잎들에게 그 세월들에 나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박수를 보냈다.

함께 어울려 색의 조화를 이루는 여린 잎의 연초록에게 눈길이 멈추었다. 같은 녹색임에도 짙은 녹색과 연녹색이 아우러져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갓 피어난 잎사귀. 그들의 색깔은 순하고 부드럽다. 잎을 굳이 만져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만지면 상처를 입을까 염려되어 만지기도 망설여진다. 그 고운 잎을. 보는 것도 조심스럽다. 순해서 여려서 작은 눈길에도 다칠까 걱정된다. 그 모습이 아름답다.

새순뿐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아기는 다 아름답다. 아기는 옷을 입고 있어도 예쁘고 벗고 있어도 귀엽다. 울고 있을 때도 사랑스럽고 웃고 있을 때는 천사다. 어떤 할머니는 손자의 응아하는 모습이 너무 애중하다며 놓치지 않고 그 모습을 본다고 했다. 떼를 쓰는 모습도 어여쁘고 순하게 말을 잘 듣는 모습이 도리어 애련하다. 세상의 모든 아기는 다 사랑스럽다.

어디 사람뿐이랴. 짐승의 새끼들도 귀엽기는 마찬가지다. 맹수인 호랑이나 사자들도 새끼는 정말 귀엽고 예쁘다. 세상의 모든 짐승을 잡아먹고 사람도 서슴지 않고 잡아먹는 호랑이나 사자가 왜 귀엽단 말인가. 아직 아무 때가 묻지 않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아기가 사랑스런 것은 순수하고 깨끗하기 때문일 것이다.

짐승의 새끼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귀여운 것도 사람이나 짐승을 잡아먹을 만큼 거칠어지지 않았기 때문일 테다.

순수함. 연초록. 그것이 그렇다. 아름다움이고 사랑스러움이며 귀함이다. 복잡한 윌셔길에 서 있는 나를 돌아본다. 나에게는 이미 사라져버린 연초록. 그 순수함. 이미 50대 중반에 서 있는 내가 연초록을 바란다면 모두가 웃겠지.

그럼에도 문득 연한녹색이고 싶다. '겉 사람은 후패하였어도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삶을 살지 못한 내가 부끄럽다. 옛날 어떤 시인은 세월을 막으려 칼과 창을 들고 길목을 지켰는데 세월은 어느 틈에 샛길로 와 있더라고 했다. 나 역시 세월과 싸워 지고 말았으니 내 겉모습이 후패해지는 것이야 어찌하랴.

그러나 속사람을 잘 가꾸고 다듬어 날로 새로워지는 삶을 살지 못하였음이 안타깝다. 저 담쟁이는 짙은 녹색을 가지고 지나온 삶을 간직하기도 한다. 그러나 해마다 봄이 오면 새로워진 모습으로 연녹색을 가지고 있다. 나도 담쟁이처럼 살 수는 없을까? 지나온 세월. 험난하고 힘들었던 그 세월도 내 삶의 한 부분으로 간직하고 나날이 새로워지는 모습으로 다른 한 구석에 연초록을 가지고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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