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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이민 다큐멘터리-15] 초기이민자 자녀교육

"아무리 어려워도 학교는 보내자" 뜨거운 교육열

◇한인학생수가 제일 많아

1933년도의 하와이 이민국 교육자료를 보면 동양인 학생 중에서 31%가 한국계 학생이었고 30%는 일본계 학생 24%는 중국계 학생 그리고 필리핀계 학생이 8%였다. 그보다 5년 전인 1928년 인구조사표를 보면 하와이 인구 35만명 중에서 일본사람이 13만4천명으로 가장 많고 필리핀 사람이 6만명 중국사람이 2만5천명 그리고 한국 사람은 불과 6천3백18명이었다.

6천명의 한국 사람이 13만 명의 일본사람들보다 더 많은 어린이를 학교에 보낸 것이다. 물론 6만 명의 필리핀 사람들보다도 2만5천명의 중국인들보다도 훨씬 많은 자녀들을 학교에 보냈다. 쉽게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의 얘기다.

당시의 우리 초기 이민들이 다른 민족보다 더 잘 살았던 것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초기 이민들은 그때도 농장의 노동자 생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그 당시 아이들과 함께 농장에서 일을 했다. 식구 모두가 그렇게 벌어온 돈으로 조금은 윤택하게 그날 그날의 생활을 해왔다.

그러나 한국사람들은 달랐다.

◇부모고생 … '공부만 열심히 해라'

이역만리 머나먼 타국에서 '내가 이렇게 노동을 해야만 했던 것은 배우지 못한 무식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자녀들만은 농장에서 일을 시키지는 않았다. 그리고 어려움이 있어도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지도 않았다. 행여나 그것 때문에 공부에 방해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살고 있는 2세 동포 도라 김 여사의 설명이다.

"1930년대에 대공황이 있었지요. 그때는 미국 전체에 일자리가 없어서 백인들도 굉장히 어려웠었어요. 우리 부모들은 정말 고생을 할 때였습니다. 나는 그때 어려서 잘은 몰랐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분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겠는가 짐작이 되고도 남아요. 그런데 우리들한테는 그런 얘기를 별로 한 일이 없었어요. 부모들이 이렇게 고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너희들은 그저 공부만 해라 우리처럼 이렇게 고생 안하게…. 그렇게만 말씀하셨어요."

한국의 초기 이민들은 아메리카에 건너가면서부터 자녀들에게 교육을 시켰다. 자격 있는 선생님이 있었을 리 없었다. 무엇을 가르칠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요즘처럼 교재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교실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한글 잘 아는 사람 선생님으로

가르칠 선생님이 있었다면 그 사람도 남들과 다름없이 농장에서 일을 해야만 했다. 수고한 대가를 줘야겠지만 줄 것도 없었고 받으려하지도 않았다.

움막같은 집이어서 방 하나를 교실로 내어주면 그 집 식구들은 밖에 나가 밤하늘 만 쳐다봐야 했다. 하루 종일 농장에서 일하고 돌아 온 터이니 밀려오는 졸음을 주체 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교육을 시켰다. 한국 글을 가르쳤고 한국말을 가르쳤다.

◇2세 동포들의 얘기다

"농장에서 한국 글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을 추려서 교사로 뽑지요. 한국정신을 잊지 않도록 하려고…. 그래서 농장마다 교회가 있었고 학교가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그 사람들(선생님들)이 가르쳐 주었지요. 옛날 식이어서 국어(한글)하고 한문을 섞어서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천자문부터 배웠습니다."

초기의 아메리카 이민은 미국에서 살았으면서도 어떤 의미에서는 조금도 미국에 동화되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특히 여자들은 한국에서 살아온 사람보다도 더 한국적 이었다. 그렇게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집안에서 밥짓고 빨래하고 바느질하고 수놓는 것 배우고 뜨개질 배우고 그런 것들 모두 다 배웠어요. 한국에서 어머니가 했던 것을 그대로 배웠지요."

동포 2세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어린이들은 언어의 장벽이 없다. 며칠 동안만 외국의 어린이들과 어울리면 그 나라말에 익숙해진다. 어린이들은 어린이들끼리 놀게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그들의 말을 배우게 된다.

그런데 집에 들어오면 부모들은 한국말을 한다. 그래서 한국말을 알아듣게 된다. 그러나 알아들을 수는 있어도 말할 줄은 모른다.

어린이들은 어느 곳을 가든지 그곳에 동화된다. 말뿐 아니라 그 나라의 문화와 문명에 익숙해지려고 한다. 더구나 그들은 부모의 조국을 본 일도 없다. 봤다 하더라도 기억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들에게 조국을 심어 준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그런데도 우리의 초기 이민들은 훌륭하게 이 일을 해냈다.

◇한국말로 안하면 대답도 안해

멕시코 이민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쿠바로 옮겨 그곳에서 자란 2세 동포 77년 당시 73살이었던 김마리아 할머니의 설명이다.

"7살 때부터 글방을 댕겼어요. 갔다가 오면 부엌에 있는 어머니에게 스패니시로 돌아왔다고 인사를 하지요. 그런데 어머니는 못들은 것처럼 대답을 안 하셔요. 그러면 '엄마는 내가 하는 말을 못 들었느냐'고 다시 묻지요 그때 엄마는 '나는 스패니시는 모른다 네가 한국말을 해야 알아듣지 스패니시로 하면 못 알아듣는다. 나는 멕시칸이 아니야' 그렇게 가르치셨어요. 그래서 집안에서는 모두 한국말을 사용했습니다."

초기 이민들이 세웠던 교회는 2세들의 한글 교육에 많은 공헌을 했다. 지금도 그 전통은 이어져서 미국에 있는 큰 교회는 2세들의 한글교육을 계속하고 있다. 매주 일요일이면 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들을 모아 놓고 한국말과 글을 가르치고 있다.

아메리카 이민 1백년사에서 교회가 가지는 비중은 여러 가지 면에서 높이 평가 해 야할 필요가 있다.

그 중에서도 초기 이민교회는 교육과 계몽활동에 앞장을 섰다. 어떤 의미에서 아메리카 이민 1백년은 교회를 바탕으로 해서 이어 왔다고 할 수도 있다.

하와이에서 살고 있었던 안정송 할머니의 얘기다.

"일리아 스트릿에 있는 이승만 박사가 세웠던 교회에 국어 학교가 있었고 또 감리 교회에 국어학교가 있었고 박용만 씨가 창설했던 독립단에도 국어학교가 있었고 촌에 있는 농장에도 교회가 있는 곳마다 국어학교가 있었습니다."

정리= 천문권 기자 cmkn@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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