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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한국인 미술가들 (119)] 화가 김봉중…색과 형태로 인생·자연의 덧없는 흔적을 그린다

강렬한 색상·절제된 형태의 뜨거운 추상표현
고난의 생활 극복하고 열정적 예술혼 펼쳐내

김봉중은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 와 현재 뉴저지주 듀몬트에 살면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그 동안 10차례 가까운 그룹전에 참가했고, 오는 4월 뉴저지주 해켄색에 있는 리버사이드갤러리에서 생애 첫 개인전을 가질 예정이다.

김씨가 미술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어려운 생활과 만화다. 이러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김봉중은 “그 당시 나만 그러한 삶을 살아온 것이 아닌 것 같아 지나온 삶을 밝힌다는 것이 매우 부끄럽고 조심스럽기만 하다”고 어려워했다. 그러나 그의 지나 온 인생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의 작품뿐 아니라 그의 인생 자체가 예술이라고 느낄 만큼 감동을 줬다. (실제로 한국에서 작가와 비슷한 연령층이 어렸을 때는 한국전쟁이 끝난 지 10여년이 지난 시대로 실제로 상당수가 가난했다)

그의 예술과 인생의 시작은 가난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시작한다. 김봉중은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을 이렇게 말한다.

“초등학교 5학년때 아버님께서 오랜 병환 끝에 세상을 떠나신 후 삶이 정말 저 밑바닥까지 내려갔다. 초등학교 2학년부터 5학년때까지 지금의 한남동에서 살았다. 다른 곳으로 떠나기 전 동네가 철거되고 각종 쓰레기가 쌓여 천막을 치고 살았다. 나는 그때 매립용으로 버려진 쓰레기 더미 속에서 전깃줄이나 그밖에 고철들을 모았다. 이것을 고철가게에 같다 주고 몇 십원을 받아서 만화가게로 달려가곤 했다. 나는 그 때 만화를 부지런히 보고 그렸는데 그러면서 그림에 눈을 뜨지 않았나 생각한다.”



한편으로 김봉중은 “초등학교 다닐 때 장충당 공원에 갔을 때 그곳에서 할아버지들이 죽 앉아계신 모습을 보면서 내가 할아버지가 됐을 때 그림을 그리면 지루하지는 앉을 것 같다”는 느낌을 가졌다고 한다. 당시에 이미 그림에 대한 정열이나 잠재력이 있었음인지 그는 하얀 종이와 샤프 펜슬만 있으면 너무 기분이 좋았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김봉중은 중학교에 가서는 그림 외에 다른 공부들은 너무 지루했다. 그저 미술 시간이 있는 날만 기다리곤 했다. 공부는 중학교 졸업할 때 갈만한 고등학교가 없을 정도로 거의 낙제였다. 결국 그는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형의 친구 소개로 지금의 서울 연건동에 있는 서울대 의과대학 전자현미경 실험실에 청소와 잔심부름을 하는 사환으로 취직한다. 김봉중은 그 곳에서 5년동안 지내면서 야간고등학교에 진학해 졸업하고, 2년정도 대입을 위해 재수하는 동안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을 경험했다.

“한번은 사환으로 일 할 당시 정말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의대 여학생이 의과대학 캠퍼스 안에 있는 미술 동아리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며칠 후 그곳 미술반 서클 학생들에게 부탁해 처음으로 미술의 기본인 석고 데생을 하게 됐다. 그리고 얼마 후 근처에 있던 화실에 들어가 그 곳에서 저의 평생의 은인이신 차일만 선생님을 뵙게 됐다. 당시 사환이 받는 급료로는 미술 레슨비에 턱없이 부족했지만 차 선생님 배려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1년간 집중적으로 데생과 수채화를 배운 후 그 해 겨울 서울대 미대에 합격을 했다. 정말 그 때 당시에는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나에겐 어제와 오늘이 너무 다른 세상이었다.”

김봉중은 어제까지는 청소부 사환이었고 오늘은 서울대 미대 서양화과(학번 8408-1108) 학생이라는 엄청난 변화를 느끼며 대학생활 4년 내내 정말 학교에서 미친 듯이 그림에 몰두했다. 거의 매일 학교 수위 아저씨가 그만 집에 가라 할 때까지 실습실에서 그림을 그릴 정도로 대학생활이 너무 기쁘고 즐거웠다. 그는 자신에게 찾아 온 삶을 그냥 놓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때 실기실에서 그림 그리는 것 외에는 미래에 대한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김봉중의 인생은 급하게 바뀐다. 서울대를 졸업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초청으로 이민을 오게 됐고, 이 이후의 삶은 그야말로 다시 저 밑바닥서 시작해야 했다. 수많은 직장을 옮겨 다녔다. 어떤 때는 작은 차에 물건을 싣고 무작정 물건을 팔기 위해 각지를 누비기도 했고, 식당에서 손님 시중을 드는 일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각박한 이민 생활 속에서도 김봉중은 그림에 대한 꿈을 놓지 않았다. 1년에도 몇 번씩 직장을 쫓겨나고, 다시 들어가고, 옮겨 다니는 생활을 반복하면서도 그는 늘 자신의 업이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고 생각해 붓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이 6일동안 하루10시간 동안 가족과 자신의 생계를 위해 일하고 있지만 저녁에는 2시간 정도씩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꿈을 위해 집 차고에서 그림을 그린다. 그러기를 벌써 세월이 21년이 흘렀다.

그러면 김봉중은 도대체 무엇을 그리는 것일까. 그의 그림에는 수많은 주제, 수많은 소재,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 스스로 “어떤 한 가지를 그림을 오래 그리면 싫증이 나서 다른 스타일의 그림으로 옮겨 간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그림 상당수는 추상화다. 그러나 그의 그림 속에는 인물이 있고, 얼굴이 있고, 파도 치는 바다와 하늘이 있고, 모래사장과 바람이 있다. 그가 쓴 색과 만들어낸 조형 뒤에는 우리가 일상생활을 살면서 느끼는 적막감이 담겨 있다. 그는 붉은색과 푸른색 물감으로 자신의 마음과 하늘과 바람을 그리고, 집 주위에서 발견된 나무 막대기를 캔버스에 올려 놔 깊은 의미를 담은 명상적인 표현으로 풀어낸다.

그의 그림은 억지로 형식적으로 분류한다면 ‘색과 형태를 기본으로 꼴라쥬(기존에 주위에 있거나 또는 만들어진 것으로 미술 재료로 사용되는 물건)를 사용하는 뜨거운 추상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김봉중은 이러한 자신의 그림, 자신만의 표현 속에 자신의 정서와 삶, 인생과 자연에 대한 관조를 담고 있다.

“나의 그림은 세상의 모든 욕망들이 시간의 흐름 속에 흔적만을 남기고 사라져감을 표현하고 있다. 나는 이를 위해 유화 재료와 버려진 나무조각, 철사, 신문기사 사진 등을 꼴라쥬로 사용한다. 한마디로 혼합재료를 사용한다고 보면 맞다. 나는 이러한 재료를 사용해 세상의 모든 욕망들이 시간의 흐름 속에 흔적만을 남기고 사라져감을 표현한다. 나는 우리가 추구하는 삶 대부분이 사라지는 것에 얽매여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김봉중은 자신의 그림이 불확실성을 바탕으로 하듯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지에 대해서 확고한 선을 긋지 않는다. 다만 그는 자신의 미래가 “현재의 연속 선상에서 결정될 것이라며 무엇보다 현재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영원히 꿈을 꾸는, 쉽게 잡히지 않는 무엇인가를 쫓아가는 이상주의자임을 드러낸다.

“내 그림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저 지금처럼 즐겁게 그림을 그리는 것이 나의 길이라고 확신한다. 미래에 뉴욕시 맨해튼에 있는 현대미술관(MOMA)에서 개인전을 여는 환상에 취해 나만의 꿈속에 빠져보면서.”

박종원 기자 jwpark88@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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