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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이민 다큐멘터리-14] 초기 이민자들의 애국심 2

이승만의 동지회·안창호의 국민회 안타까운 분열

◆가슴 아픈 독립단체의 분열

아메리카의 초기 이민들의 생활을 취재하면서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독립단체의 분열이었다.

서로 싸워야만 했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일을 하다보면 의견이 맞지 않을 수도 있다.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서로 미워해야만 했던 초기 이민들의 생활은 부끄럽기만 했다.

"회관에 모이면 왜 그렇게 싸움부터 하는지…. '그 왜 회관에 모이세요? 싸울 것 같으면…' 하고 아버지한테 그렇게 얘기하죠. 그런데 나중에 또 싸우고 헤어져요. 왜 그랬는지…."

"하와이 섬의 힐로를 갔는데 양쪽 사람들끼리 서로 손잡고 인사만 해도 벌금을 물더라구요. 그러니 얼마나 심했어요."

아메리카의 초기 이민들은 크게 봐서 두개의 부류로 갈라져 있었다. 독립운동을 했던 당시의 '국민회'와 '동지회'라는 소속감으로 분류되었다. 세월이 흐르니 물론 예전처럼 싸우려 들지는 않았다. 미워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단 한가지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박사를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는 구분은 아직(1977년)도 뚜렷했다.

하와이에서 살고 있었던 당시 97살 도진호 할아버지의 설명이다.

"이 박사는 원래 성격이 자기 주장이니까 자기를 따르는 사람을 좋아하고 자기에게 '옳지 못합니다 그러면 안됩니다'는 등 시비를 가리는 사람은 그만 두게 해요. 그런 까닭에 이 박사를 따르는 이들은 동지회로 나서고 그러치 못한 이들은 안창호씨를 중심으로 한 국민회에서 활동했지요. 그렇게 갈라져 가지고 그 뒤에는 합의하기가 대단히 어려웠습니다."

◆분열 아니라 '접근방식 달라'

1902년 하와이 초기 이민 제1진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들어 가던 해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2년 뒤인 1904년에는 이승만이 호놀룰루를 거쳐 워싱턴 DC로 갔다.그리고 같은 해 박용만은 네브라스카 주로 건너갔다.

이들은 모두 미국 유학생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몇 년 뒤 이들은 미주 한인사회의 지도자적 인물이 됐고 독립운동의 기수가 됐다. 조국의 독립이라는 대 명제 아래서 이들은 뭉쳤다. 그러나 독립을 찾으려는 방향에서 그들은 서로 다른 방법을 생각했다. 그래서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분열'이라고 표현하지는 않는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여생을 보냈던 당시 89살 송철씨의 얘기다.

"박용만 이라고 하는 이는 하와이에서 왜놈들을 치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군단을 조직하고 훈련을 시켰고 또 여기 도산 안창호씨는 인재를 길러서 한국을 독립시키겠다고 해서 흥사단을 조직하는 일이 그이의 목적이었고 그리고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박사는 처음부터 왜놈들이 세계5대 강국의 하나인데 우리가 언제 그렇게 하겠는가. 따라서 방법은 다른 5대강국의 동정을 얻어 가지고 일본을 때려눕히는 것이 그의 정책이었지. 그래서 그분은 외교를 내세웠고 그것이 그의 기본 정책이야."

◆독립 기치 아래서는 모두 단결

아메리카의 초기 이민들은 크게 봐서 동지회와 국민회 소속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보다 많은 단체들이 있었다. 어떤 것들은 들어보지도 못했던 이름의 단체도 있었다. 하나의 단체가 있었다 해도 서로 뜻을 같이 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또 나눠지는 예도 있었다.

물론 그 많은 단체가 모두 다 독립단체는 아니었다. 어떤 것은 친목을 목적으로 했다. 어떤 것은 상부상조와 교육장려를 위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한가지 공통된 점이 있다. 배일감정 즉 일본을 싫어했고 직접 선두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조국독립이라는 데는 주저함이 없었다. 어제까지 싸웠던 사람들도 오늘 독립운동을 해야겠다는 필요가 있을 때는 뭉쳤다. 그리고 또 하나 외롭고 서러운 백성들이라는 공동의식은 버리지 않았다.

다시 이상억 교수의 얘기다.

"우리가 볼 때에 이승만 박사의 동지회라든지 그 반대 당인 국민회라든지 다 애국심은 강해요. 독립이라면 핏대를 내고 그럴 정도로 강해요. 서로 개인 감정으로 대립하는 일은 많지 않아요. 또 그렇게 서로 다른 단체로 갈라졌어도 동지회든지 국민회든지 사람이 죽으면 그 장의사에는 그전에 알던 사람은 모두 다 와서 조문하면서 같이 슬퍼하는 것을 봤습니다. 자기네들이 같은 대한민족이라는 데는 조금도 차이점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독립단체 실제 권익 위해 활동

시원찮게 대했겠지만 주미 일본대사는 그들의 권익을 옹호한다는 미명아래 한국인들을 자국민으로 간주했다. 초기 이민들은 싫었어도 필요한 때는 일본대사관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나라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 나라가 일본의 영토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1948년 정부 수립이 될 때까지 아메리카의 초기 이민들은 대외적으로는 일본국민이었다. 그래서 2차 대전 중에는 일본사람들과 똑같이 감시 받고 집단 수용될 뻔한 일이 있었다. 그때 우리 초기 이민들은 우리는 일본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때도 독립단체들은 한데 뭉쳤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살았던 김기열 할머니의 얘기다.

"우리도 영락없이 일본사람과 같이 잡아 갇힐 형편이 꼭 됐었습니다. 이러니 우리는 어데 가서 호소할 데가 없었어요. 우리가 무슨 영사가 있었소 대사가 있었소. 우리를 보호해 줄 사람이 없었어요. 이래가지고는 안 되겠다. 모모한 지사들이 모여서 우리 한인과 일본인을 구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밤낮으로 얘기 해 가지고 중앙정부에다가 청원을 했지요. '우리 한인을 일본인 취급하지 말아라'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어 우리 한인들은 뽑아져 나왔지요."

초기 아메리카 이민들의 정신적인 지도는 독립단체에서 맡아 해왔다. 그리고 실질적인 권익 옹호도 독립단체에서 해왔다. 독립단체는 국가였고 대사관이었고 영사관이었다. 한인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면 항상 그들을 위해 싸웠다. 그런 의미에서 비록 분열돼서 싸웠다하더라도 그 공헌을 망각할 수는 없다.

그 동안 많은 세월이 흘렀다. 왜 그들이 서로 나뉘어서 미워했는지 돌이켜 생각해보는 것도 이미 늦은 것 같다. 다만 그들은 조국의 독립만을 생각하면서 싸워온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뿐이었다고 덮어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정리=천문권 기자 cmkn@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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