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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엽 기자의 엄빠일기] 일사천리로 진행된 조카의 유학

"백수와 별로 다를 게 없는 시간이 많이 남는 생활인데 네 둘째 내가 봐줄까. 수저 하나만 더 놓으면 될 일 아니겠냐." 2009년 가을 다시 홀아비 미국 생활을 재개하면서 국제전화로 여동생에게 둘째 아이를 보내도 좋다고 말했다.

매사에 억척이고 치맛바람 기질이 다분한 여동생이 기회만 닿으면 '햄달새'를 미국에 조기유학 시키고 싶어하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햄달새는 여동생의 둘째 딸로 내가 지어준 별명이다. 햄스터와 종달새를 결합한 말인데 햄스터처럼 귀엽지만 앙칼지고 또 종달새처럼 쉬지 않고 재잘재잘 떠드는 아이여서 이런 이름을 붙여줬다.

여동생은 내 제안에 "괜찮겠어? 할 수 있겠어?" 이런 식의 인사치레 혹은 확인의 말 한마디도 없었다.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만 6년 넘게 생 홀아비로 두 아이를 미국서 키웠던 오빠의 경력을 아마도 십분 높이 샀던 탓이었을 것이다.

동생은 그 자리에서 조기 유학이 가능한 학교를 서둘러 알아봐달라고 했고 그때부터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됐다. 10월에 햄달새를 봐줄 수 있다는 말을 건넸는데 11월 추수감사절 때 동생과 햄달새가 미국으로 날아와 내가 찍어준 한 학교에서 전학을 위한 간단한 시험과 교장 선생님 면접 등을 치렀다.



이 학교는 가톨릭 계통이었는데 일일 술술 풀리려고 그랬는지 유학 비자 또한 빨리 나왔다. 가톨릭 학교들이 일반 사립학교에 비해 학비가 싼데다 자금난 때문에 유학생을 잘 받을 것 같아 추천했는데 예상이 들어맞았던 것이다.

서울에서 초등학교 3학년을 마치기 직전이었던 햄달새는 이렇게 해서 만 9살도 채 안된 이듬해 2월 초 본격적으로 미국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늙은 외삼촌 햄달새가 지어준 별명으로 하자면 '할배 삼촌'과 어린 조카의 남들이 보면 기가 찰 수도 있는 또 하나의 가족이 간단하게 구성된 셈이었다.

조카 키우기는 그러나 카드 패로 따지면 조커 같은 것은 전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수저 하나 더 놓는 기분으로 가볍게 생각하고 받았는데 사람이라는 게 한번 '수령'한 이상 거두거나 달리 내칠 수도 없는 하늘이 맺어준 무거운 인연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결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람은 확실히 망각의 동물이다. 홀아비로 아이를 키운 게 처음이라면 모를까 6년 넘게 그 짓을 하고도 "혼자 아이 키우는 게 뭐가 힘드냐"는 식으로 조카 키우기를 자청했으니 말이다. 여자들이 산고를 사실상 까먹는 것도 망각의 동물이기 때문이라면 비약일까. 죽음과도 같은 모진 산통을 여성들이 두고두고 기억한다면 아마 둘째 셋째는 갖기 어려울 것이다.

한쪽 날개로만 날아야 하는 비행기와 같은 생 홀아비 혹은 생과부 생활은 당사자가 아니면 그 황망함과 공허감을 십분 이해하고 말하기 어렵다. 육체적인 점보다는 정신적인 측면에서 훨씬 그렇다. 부부의 인연은 확실히 살아있으되 그러나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자고 깨어나서도 옆에 남편 혹은 아내가 없는 상황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3~4년씩 지속될 때 형성되는 그 감정은 참으로 미묘하고 당황스럽다. 생과부 생 홀아비 생활은 뭔가 뒤틀려있으면서도 은근히 고통스런 정신적 고문의 나날을 보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뒤늦게 아빠 앞에 불쑥 나타난 늦둥이 마냥 조카의 존재는 잊혀졌던 생 홀아비 생활의 복잡미묘하고 혼돈스러웠던 이런 저런 기억들을 빠르게 되살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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