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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이민 다큐멘터리-12] 독립자금모금2…"독립선언 33인 가족부터 돕자" 부인들도 열성

◆ 독립선언 33인 가족 위해 모금

독립운동에는 부인들도 열성으로 참여했다. 남편이 참여하기 때문에 참여한 것은 아니다. 남편의 나라가 바로 내 나라였다. 더구나 그들은 사진 혼인으로 늦게 들어온 사람들이다. 일본의 발악적인 만행을 직접 눈으로 봤고 또 일부는 그것이 싫어서 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더 열성적이었던 것 같다.

“하와이 부인회는 1913년에 '대한인 부인회'라는 이름으로 조직이 되었어요. 그때는 그저 여기에 한인이 사니까 부인회를 조직했는데 일화배척을 목적으로 했고 자녀교육 권장하는 것, 장려하는 것 또 교회 및 사회 도와주는 것 그런 일을 위해 일했습니다. 그런데 1919년이죠? 삼일독립 선언한 그 소식을 전보로 받고는 4월 7일에 모였습니다. 그때 공동대회로 모였습니다. 각 지방에 계신 부인들이 41명이 모여 가지고 어떻게 하면 좋을까? 지금 조국에서는 독립선언이 선포됐는데 우리는 이제 우리나라를 위해 어떤 일을 했으면 좋겠느냐? 그때 우리 생각에 33인은 모두 잡혀가서 곤경을 당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우선 그 가족부터 구제를 하자 그래서 거기서 모금을 해서 1천5백 달러를 먼저 보냈어요.”

◆ 노름방에서도 독립자금 모아



하와이의 초기 이민들은 4개의 섬에 흩어져 있는 각개의 농장에서 일을 했다. 한개의 농장에는 많으면 4-50여명 적게는 한 두 명의 한국인들이 있었다.

독립자금을 거두러 다니는 사람은 이 섬, 저 섬을 건너면서 이 농장 저 농장을 찾아야 했다. 어렵게 찾아가 보면 이미 다른 농장으로 옮겨 버린 일도 있었다. 어떤 때는 일터에 나가고 없는 때도 있었다. 그래서 하루에 한 농장을 찾기도 힘들었다.

시내에 사는 사람의 경우는 더 어려웠다. 일터가 어딘지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만나기만 하면 어느 곳이었건 주저하지 않고 있는 대로 바쳤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살고있었던 송철씨의 얘기다.

“광복 사업을 위해 돈을 거두러 돌아다닐 때 일하는 영감님들을 만나려면 먼 시골의 일하는 데를 직접 가야해요. 그렇지 않으면 타운에서는 청국인(중국인)들의 노름방에 가면 그분들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시골 농장에서 돈을 벌면 노름방에 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이들을 만나려면 노름방에 가야했습니다. 그 노름방에 가서 영감님들을 만나서 얘기를 하면 그 사람들은 자기네 돈을 있는 대로 털어 주어요.”

노름하는 곳에서는 돈을 빌려주지도 않는다. 돈을 빌려주면 돈을 잃게 된다는 그들 나름의 법칙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빌려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바쳤다. 주머니에 있는 대로 털어서 바쳤다. 어쩌다 타락해서 노름을 하고 있을 망정 나라마저 잊은 그런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 본국·멕시코동포 구제도 모금

아메리카의 이민들은 낯선 땅에서 눈물겨운 고생을 했어도 일제의 압박에 시달리는 본국의 동포들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하와이의 동포들은 멕시코의 동포들 보다는 생활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독립자금에서 여유가 생길 때면 본국 구제금으로 돌렸다.

당시 로스앤젤레스 애국단 회장직을 맡았던 이화목씨로부터 애국단이 모금했던 기금 사용 내역을 들어본다.

“상해 임시 정부 1천 달러, 상해 독립신문사에 3백 달러, 광복 위로금으로 임시정부에 5백 달러, 구미위원부의 군축 선전비로 5백 달러, 신한민보 식자비로 5백 달러, 북간도 동포 구제금으로 67달러,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한 송미령 여사(자유중국 장개석 총통의 부인)에게 군사 위로금으로 3백70달러, 멕시코 동포 하바나로 이민할 때 동정금으로 40달러, 쿠바 동포 구제금으로 55달러, 본국의 이재민 구제금으로 1백72달러, 본국 수재기금으로 각각 3백68달러와 2백72달러, 본국의 소년갱생 운동에 보태 쓰라고 송정현 여사에게 55달러, 황은순 고아원에 58달러, 장해숙, 이한나에게 2백67달러, 2차 대전 중 미국 적십자사에 5백75달러…”

◆ 나라 없는 한에 맺혀 조국사랑

아메리카의 초기 이민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것은 그저 감상적인 충성은 아니다. 그들만이 느껴야했던 비참한 운명에 수없이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라 없는 서러움을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정말 한국에 있는 그 사람들은 나라 없는 한을 그렇게는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가끔 느끼게 됩니다. ‘나라가 없어서 이렇구나,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다.’ 어디 여행을 갔다 오더라도 우리를 일본사람 맨 뒤에다 세운 다고요. 그런 것을 당할 때마다 가슴이 얼마나 아파요? 여기서 특히 약한 민족으로 있으니깐 나라 없는 것을 더 느끼게 되거든요.”

그래서 그들은 고국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럴 수도 없었다. 더구나 멕시코의 한국인들은 노동계약이 끝나는 해에 한일 합병소식을 들었다.

◆ 한일합병 소식, 갈곳 잃고 주저 않아

“본래 우리 1세 동포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4년 기간을 마친 뒤 거의 다가 다시 서울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고요. 헌데 합병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주저앉았어요.”

나라가 없어졌는데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곳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무섭게 내려 쪼이는 햇볕 아래서 뼈를 깎는 듯한 아픔을 참고 노동을 할 때, 조국은 독립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파란 고향하늘, 누렇게 익은 가을 들판이 생각 날 때 조국은 독립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머니 아버지의 얼굴이 아련히 떠오를 때도 조국은 독립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양사람에게는 집도 팔 수없다고 거절당했을 때 조국은 독립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주머니를 털었다. 그 돈이 독립에 쓰여진다면 아까울 것이 없었다. 나라를 찾아야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들은 그저 단순했다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조국독립에 돈을 바친다는 그것이 그들의 보람이었고 인생의 전부였다.

정리= 천문권 기자 cmkn@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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