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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길 '계단' 추억으로 오르다

LA 곳곳 숨어있는 '보물 흔적'
LA주거지 '옛 정취' 속속
살아있는 계단만 270여개

그보다 느린 로컬길에서도 길은 곧 속도다. 그런 LA에도 자동차는 못 가고 걸어서만 갈 수 있는 길이 있다. 바로 계단이다. 계단은 인간이 직립 보행하는 존재임을 온 몸으로 느끼게 해준다. LA에는 의외로 계단이 많다. 한인타운 인근에도 많다. 게 중에는 독특한 정취를 느끼게 하는 계단도 적지 않다. '잊혀진 길' 계단을 올랐다.

계단은 잊혀진 길이다. 자동차가 일반화되기 전에는 LA에서 전차(트롤리)와 보행도로가 일반 시민들의 주요 대중교통 수단이었다. 전차와 보행도로 대부분이 없어지고 차도로 바뀌었지만 보도의 일부였던 계단은 여기저기 남아 있다.

자동차길을 내기에는 좁거나 경사가 높은 경우 조금만 돌아가면 길과 길이 연결되기 때문에 굳이 따로 길을 내지 않았다. 그 길이 그저 사람만 다니는 샛길처럼 남았다. 그렇게 계단은 자동차 문화가 발달하면서 역사 속으로 잊혀진 길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직도 도시의 한 부분으로 남아 나름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지난 14일 오전 에코 파크 애비뉴 인근 아발론 웨스트 계단으로 올라섰다. 앞서 계단을 오르던 여성이 보이는가 싶더니 갑자기 사라졌다. 여자가 사라진 지점에서 둘러보니 계단을 따라 무성하게 자란 풀숲에 가려 작은 골목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여성은 동네 주민이었다. 계단 위로 갈수록 번지숫자는 올라가고 그 숫자 앞에는 어엿한 대문이 있다. 시골 좁은 길로 장에서 뭔가를 사가지고 집으로 들어서던 기억 속의 계단이 떠올랐다.

이 동네에서 계단은 살아있는 길이었다. 아발론 웨스트와 큐란 스트리트의 계단집에는 우체부도 걸어서 계단을 오르내릴 수 밖에 없었다. 자동차의 도시에서 차로는 못 가고 계단이 유일한 접근로인 집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LA의 계단들은 북쪽 구릉지대에 특히 많다. 어떤 곳은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의 경사진 길을 방불케한다. 서쪽으로는 샌타모니카에서 할리우드를 거쳐 실버 레이크 에코 파크로 동쪽으로는 패서디나에 이른다. 살아 남아 있는 계단은 LA에만 275개가 넘는다.

계단은 혼자서는 힘들고 함께 가면 전혀 힘들지 않았다. 취재차 혼자 걸을 땐 겨우 50개를 오르고서도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7학년 딸아이와 함께 오르니 라베타-테라스나 아발론 웨스트 계단 어디에서도 땀 한 방울 나지 않았다.

추억을 되살리며 계단의 정취를 오르려면 멀리 가지 않아도 된다. 한인 타운 인근에는 1924년 조성돼 1998년 LA사적 657호로 지정된 '로스펠리스 하이츠 스텝'(181계단 4803 Cromwell Ave. ↔ 4796 Bonvue Ave.)은 두 사람이 손잡고 오르기엔 조금 좁지만 중간에 두 곳의 휴식 공간이 마련돼 있다.

이 계단에서 인근 주민인 지넷 할머니를 만났다. 매일 이 계단을 오르는 할머니는 "하루에 100여명 정도가 계단을 찾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루에도 몇 명씩 할리우드 사인이 어느 쪽에 있냐고 물어봐요. 사실은 그 사인이 어디에 있는지 나도 무척 궁금해요(웃음). 그 덕에 매일 새로운 사람들이 계단을 찾는 걸 알게됐어요."

실버레이크나 에코 파크 같은 비교적 오래된 주거지들에 많은 계단은 LA의 숨은 보석과 같다. 반짝이지는 않지만 사막 한가운데 거칠 것 없이 줄 긋고 세웠다고 오해했던 LA를 다시 보게 한다.

건축사무실 'PQNK'의 이웅범 대표에 따르면 현대 건축규정상 계단 한 단의 높이는 4~7인치 깊이는 11인치 이상이어야 한다. 또 계단참이라 불리는 계단중간의 넓은 공간은 높이 12피트 마다 하나가 있어야 한다. 폭은 36인치는 돼야 한다. 자연 속 계단이 모두 이 규정 수준은 아니다.하지만 대체로 건축규정의 안전 개념은 지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계단 오르기는 짧은 시간에 산행과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는 '미니 등산'이다. 평지를 뛰는 것만큼 운동 효과를 낸다. 박상욱 발.발목전문의는 "오르막에서는 무릎 위 앞근육과 엉치뼈의 근육이 종합적으로 단련된다. 반복적인 하체 운동이 가능해서 운동효과는 최고"라고 말했다. 내리막에서는 오르막의 운동효과에 더해 종아리 근육을 단련시킬 수 있다. 물론 무리를 하면 역효과가 난다. 박 전문의는 "계단 운동은 평지 도보 운동과 달리 항상 브레이크가 걸리기 때문에 천천히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문득 자동차에게 빼앗긴 것이 계단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스쳤다. 계단을 잃어버려 뜨거운 햇빛과 시원한 그늘 호젓한 자연을 조금 더 많이 잃어버린 게 아닐까.

장병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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