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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엽 기자의 엄빠일기] 홀아비 되니, 과부 심정 알게 돼

바느질 얘기를 한번 더 해야겠다. 고등학교 때 '조침문'이라는 조선시대 가사문학에 대해 배운 적이 있다. 조침문에서 조는 조의를 표한다는 뜻이고 침은 바늘을 가리키는 것이니 바늘의 죽음을 슬퍼하는 일종의 조사였다. 바늘 허리가 부러져 평소 아끼던 바늘과 이별을 해야 하는 일찍이 남편을 여읜 여인의 가슴 아픈 심정을 절절하게 담았는데 뛰어난 문장력이 한 눈에 돋보였던 글로 기억된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당시 조침문을 대했을 때 작자에 대한 첫 인상은 지금까지도 온전히 남아있다. 작자가 조선시대가 아닌 오늘날 태어났다면 유수의 문학상 몇 개쯤은 가볍게 휩쓸 날리는 여류 문인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조침문이 생 홀아비 생활이 대략 7~8년째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좀 더 콕 집어 말하면 그 여성 작자에 대한 이해의 심도가 한결 깊어졌다. 속되게 표현하면 홀아비로 적지 않은 시절을 지내보니 과부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겠다는 얘기쯤 되겠다.

젊은 시절 남편을 떠나 보내고 청상의 길을 걸어온 조선시대 여인에게 바늘보다 귀중하고 사연이 많은 물건이 있었을까. 긴긴 밤 어두운 불빛 아래 바느질에 열중하다 그 바늘로 허벅지를 찔러야 했을 때가 아마도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이다. 손에 바늘이 들려있지 않았을 뿐 나 또한 조침문을 쓴 여인과 감히 비슷한 밤을 적잖게 보냈다고 실토할 수 있다.



꼭 청상이 아니라도 또 조선시대가 아니라도 남편이 곁에 없는 상황을 이겨내야 하는 여인네들이 비일비재할 수 밖에 없는 게 인생사이다.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기러기 가족 엄마들도 대략 이런 부류가 아닐까. 생 홀아비 생활을 한참을 하고서야 역지사지 홀로 사는 여인네의 마음을 읽기 시작한 것은 무엇보다 타고난 둔감 탓이다. 하지만 곁에 엄마가 없는 아이들을 데리고 하루 하루를 투쟁하듯 살아야 했던 초기 미국 생활의 빠듯함도 한 몫을 했다. 도대체 딴 데로 눈을 돌릴래야 돌릴 여유가 일체 없을 만큼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빡빡하게 살아야 했으니까.

생활 여건 탓이든 둔감 때문이든 요즘 들어서야 가끔씩 과거 가까이 지냈던 '생과부 형수' 생각을 하게 된다. 2000년 초반부터 LA 교외의 한 아파트 단지에 같이 살았던 두어 살 아래인 생과부 형수는 고향 선배의 아내였다. 우리 집과 마찬가지로 딸과 아들 자식 둘을 키우는 전업주부였는데 선배는 미국 이주 첫 1년만 같이 식구들과 같이 지내고 곧바로 혼자 서울로 돌아갔다.

우리 집과 형수네 아파트는 타운홈 형식으로 크기와 구조까지 완전히 똑 같은 집이었다. 두 집 사이에 거리는 50미터도 채 안됐다. 그러나 워낙 바빴던 탓에 왕래가 그리 잦을 수는 없었다. 다만 형수네 아이들이나 우리 아이들이 비슷한 또래여서 형수와 나 사이보다는 훨씬 교류가 많았다.

한 달에 한번쯤 두 집 식구가 온전히 모일 기회가 있었는데 십중팔구 형수네가 우리 식구들 초대하는 형식이었다. 난생 처음으로 미국 생활을 시작한 지 4년째인가 되던 어느 날 양쪽 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형수가 내게 조용히 그랬다. "이게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뭔지 정말 힘들어 하는 게 역력해 보여 이 말 저 말을 주워담으며 심각하게 위로하는 시늉을 했지만 그때의 형수 심정을 절절히 이해하게 된 것은 자식들 대신 조카를 키우고 살면서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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