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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이민 다큐멘터리-10] 사진신부 김기열 할머니 (2)

"17살 많은 남편 보고 울었다…운명이라 생각했다"

◆시아버지 될 분 직접 찾아와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먼길을 왔습니다. 아들 없는 며느리라니 애처롭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습니다. 미국으로 가기 전에 며느리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체면 없이 왔습니다."

말하자면 '사돈의 집'이었다.

그처럼 반대했던 부모들이었지만 그래도 손님 대접을 해주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회유책이었는지도 모른다. 형편없이 생긴 시골 영감을 보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 것으로 기대했을 지도 모른다. 아니면 양반의 체면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딸애를 불러서 인사까지도 시켰다. 그러나 김기열 할머니의 마음이 바뀌지는 않았다.

"어느 날 저녁을 먹고 난 뒤에 어떤 시골 영감을 데리고 들어왔어요. 우리 시아버지의 성명이 박군석씨예요. 이 노인이 전라도 아무 아무군데서 사시는 박군석씨다 나와서 인사해라. 명색이 시아버지지요 내 민적을 그 집에다가 옮겨 놓았으니까. 할 수 있나요. 나가서 인사를 했지요. 그리고 난 다음에 그분은 부산에 온 것이 처음이니까 오빠가 안내하면서 한 사날(3-4일) 부산 구경을 시켜드렸지요. 그러더니 아무 날은 간다고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나는 그때 혼자서 보따리를 쌌지요."

◆ 나는 박씨 시아버지 따라 나서

무척이나 당돌했지만 '나는 이제 김씨가 아니라 박씨의 식구'라는 결심을 했다. 그렇다면 내가 시집에 가 있어야지 친정에 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부모들이 어떻게 생각했을까? 지금 생각하면 무척이나 가슴도 아팠겠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이 없었다. 이미 결정은 내려진 때였다. 그리고 이제는 처녀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남의 부인이 됐으니 머리 매무새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내 머리 참 좋았습니다. 내 구름 같은 머리 따 내렸습니다. 그리고는 보따리 싸들고 나는 죽어도 박가네 집에서 죽을 터이니 내 가는 길을 금하지 말라. 따라 나섰지요. 그러나 그렇게 될 리가 있겠습니까? 이 얼마나 큰 망신이요?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그저 입이 딱 벌어질 일이지요. '저런 세상에 망칙한 년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나를 말릴 수가 없지요. 그때 내마음이 칼날 같았습니다. 꼭 내가 박씨 집으로 가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었는가봐요. 보따리를 내가 들고 나섰으니까요."

부모들의 작전은 실패했다. 그리고 이제는 막을 길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언제 볼 지도 모르는 딸을 그냥 보낼 수만은 없었다. 그날 하루 밤만이라도 더 있다 가기를 원했다.

그 날밤 어머니는 딸을 붙들고 울었다. 물론 딸도 울었다. 그래도 미국으로 가야겠다는 그 결심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다음날 남편 얼굴도 본 일없는 이 신부는 시아버지를 따라 남편의 고향으로 떠났다.

◆ 80리 걸어다니며 수속 마쳐

시가(시댁)에 도착한 김기열 할머니는 그때부터 미국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고된 줄도 모르고 여권을 내기 위해 익숙하지도 못한 시골길을 걸어다녔다.

"군청이 순천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무주에서 순천까지 80리를 걸어서 군청에 들어가서 모든 수속을 마쳤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사진 결혼으로 미국에 건너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절차를 밟았다. 태평양을 건너서 미국에 들어갔다가 이민국에서 결혼을 했다.

"한달 사흘이라던가 나흘이라던가 참 그때 풍파 많았습니다. 한달 넘게 배속에 있다가 도착해서 이민국에서 결혼하고 우리 남편이 워싱턴주 스포켄에서 농사하고 삽디다. 그곳으로 갔지요."

당시 남편의 나이는 35살이었다. 17년이나 되는 나이 차이를 가졌지만 그들은 결합됐다.

물론 다른 사람들처럼 나이 많은 남편을 보고 실망도 했다. 눈물도 흘렸다. 다시 돌아가겠다고도 했다. 돌아가려면 여비를 다시 내 놓아야 한다는 으름장도 들었다.

◆ 지은 죄 많아 '운명'이려니 …

그러나 그 보다 더 그를 못 가게 만든 것은 미국에 오겠다고 기를 쓰며 엮어 놨던 자신의 과거였다.

아버지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고 오빠의 얼굴이 떠올랐다. 시아버지와 다른 시집식구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이민 수속을 밟으러 뛰어 다녔던 무주에서 순천까지의 시골길이 생각났다.

그러다 그는 이것이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참고 살면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럴수록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끝까지 반대했던 부모들에게 잘 못산다는 얘기가 전해지는 것이 싫었다. 어떻게든 돈을 많이 벌어서 어머니에게 비단 옷이라도 사다 들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남편이라는 사람을 따라 나섰다.

◆ 자식 열명 낳아 잘 키워

수십 년이 지나는 동안 고생도 많이 했지만 미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그 결심은 모두 실현 됐다. 남들처럼 몇 백만 달러의 재산은 없지만 부러움 없이 살아가고 있다. 그 동안에 고국에도 4번이나 갔다왔다. 부모님들은 이미 돌아 가셨기에 뵙지는 못했으나 형제와 그의 가족들은 만났다. 모두가 잘 살고 있었다. 김기열 할머니의 자랑은 고생 속에서도 남부럽지 않게 키워온 자식들이다.

"자식 열을 낳았습니다. 4남 6녀가 잘 자랐습니다. 미국을 위해서 일했고. 한국전쟁에도 나갔습니다. 아들 4형제가 모두 한국전 참전용사들 입니다."

김기열 할머니는 로스앤젤레스에서 편안히 말년을 보냈다. 그리고 그곳에 묻혔다.

김기열 할머니의 얘기는 한사람의 생애는 아니다. 당시 사진 결혼을 통해서 들어온 모든 한국여인들의 모험담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사회의 모습이었다.

정리= 천문권기자 cmkn@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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