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이민 다큐멘터리-9] 사진신부 김기열 할머니
"미국가면 시집살이 없다는데…" 부모몰래 떠날 준비
"사진을 보내줄 때 내 주소는 어디며 내 부모의 성명은 누구며 내 나이는 얼마며 내 이름은 누구다라는 내용을 첨부해서 보내 줍니다. 그러면 사진 받는 사람(여자)이 마음에 들면 자기의 주소와 이름 등 인적 사항을 또 보내 준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때 부터 편지 내왕을 하지요."
김기열 할머니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살고있었다. 77년 당시 나이 77살 한국나이로 하면 78살이었다. 고향은 경상남도 동래군 사상면 모라리였다. 남편의 이름은 박술씨. 그래서 미국식으로는 박기열이라고 부른다. 남편 박술씨는 대구 출생이었으나 전 가족이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장지리로 이사를 했다.
◆ 13세때 사진받고 마음 굳혀
김기열 할머니가 사진 혼인으로 미국에 온 것은 1918년 그때 그의 나이는 18살 이었다.
김 할머니는 그보다 5년 전인 13살 때 중매에 나선 동리 할머니의 유혹을 받았었다.
"미국에서 장가 갈 사람들이 있다는데 너희들 혹 미국 갈 생각이 있느냐? 그럴 생각이 있으면 여기 사진이 있으니까 결혼을 하라고 그러더라구요. 그 할머니의 여러가지 얘기를 듣고 생각을 해보니 이것 참 미국이라는 데가 좋구나. 우리 부모네들이 항상 시집살이가 어렵다고 그러는데 야 이거 시집살이도 안하고 좋겠구나. 그럼 한번 가 보자. 이렇게 돼서 우리도 사진을 찍어서 그 할머니한테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또 우리들 사진을 미국에 있는 그 사람들에게 보내 줍니다. 그러면 자기네들도 사진을 보고 고르지요."
◆ 미국은 시집살이 없는 낙원
소꿉시절부터 푸른 바다를 바라보면서 자라 온 김기열 할머니는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 가는 기선을 보면서 저 먼 곳에 어떤 낙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미국이라는 나라가 그런 곳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문득 그는 그곳에는 시집살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 때 시집살이 생각을 했는지는 모른다.
몇 년이 지난 뒤 그는 동리 할머니를 만났다. 그 할머니는 미국이라는 곳에는 시집 살이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얘기를 했다. 그러나 시집살이가 없다는 생각만이 그의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갑자기 어렸을 때의 그 정경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미국에 갈 것을 생각했다. 부모님에게 그 의향을 전했다.
◆ 부모반대에 오히려 혼인 결심
"우리 부모님들은 물론 죽인다 살린다 했지요. 그런데 나는 친정 집의 부모가 너무 그러니까 마음에 배심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이 집에서는 더 이상 살수가 없다는 그런 생각이 듭디다."
일종의 반발 의식이었을 것이다. 부모들이 반대를 하면 할수록 미국으로 가야한다는 생각을 했다. 마치 사명감과도 같은 의지를 가졌다. 5남매의 막내딸 기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모로서는 그만큼 귀엽고 사랑스런 딸이었다. 그래서인지 부모들은 돌아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는 가망 밖이지요. 저년을 약사발을 안겨서 죽였으면 죽였지 그렇게는 안하겠다는 거예요. 남편을 보았소? 또 미국이라는 데가 어데요? 이거 다 모르는 구식 노인들이에요. 그때 우리 집 굉장히 완고했어요. 그래서 여자가 그런데로 (미국) 가면 집안 망신이 되네 부모한테 제일 큰 망신이 되네…. 뭐 별 별 얘기들이 많았어요"
◆ 오빠 도움으로 준비 수속
안되는 일을 해내려면 반드시 공모자가 있어야 한다. 이해하고 협조해주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김기열 할머니는 그때 오빠를 생각했다. 그래서 오빠에게 사실을 얘기했다.
"오빠가 말하기를 '내가 미국에 가라는 말은 안한다. 그때 시절에 미국에 간 사람들이 부모한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한 사람들은 아마 안 갔을 꺼다. 난봉 난봉 하다가 난봉이 진한 사람들이 미국에 갔을 것이다. 가서 미국의 문명을 배워 깨달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깨닫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 중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느냐 나쁜 사람을 만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너의 행복이지 내가 알 바가 아니다.' 지금도 오빠의 그 소리가 귀에 쟁쟁합니다."
오빠는 일본에서 학교를 나온 개화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오빠도 미국으로 이민 떠난 사람들을 좋게만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빠가 그렇게 생각할 때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겠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쩌면 그런 얘기들이 정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진 한 장으로 남편될 사람을 다 평가할 수도 없었다. 중매하는 할머니의 얘기가 모두 사실일 수만은 없다. 그래서 그는 망설였다. 그러나 오빠는 사명의식을 불어넣어 주었다.
"우리 한국 신여성들도 미국으로 좀 나가야 한다. 우물 안에 있는 개구리처럼 조그마한 하늘만 쳐다보고 그래서 그것밖에 모르는 사람이 돼서는 안된다. 네가 가기를 원하면 내가 주선해주마."
오빠의 허락을 받은 그는 부모 몰래 사전 준비작업을 시작했다. 요즘 얘기대로 초청장을 받는 수속을 했던 것이다.
◆ 미국 비자 받으려 호적도 옮겨
"내 민적(호적)이 남편의 집에 있어야 미국 입국 비자를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시가 댁으로 민적을 옮긴 뒤에 남편될 사람이 미국 정부에다가 이 사람은 내 부인이다. 내가 데리고 살아야겠다. 그러니 비자를 달라 이렇게 요구를 하지요."
모든 수속을 오빠가 해주었기 때문에 그는 알 길이 없었다. 그저 빨리 미국으로 갈 것만을 생각했다. 그리고 사진에서만 봤던 남편을 생각했다. 밤이면 사진을 가슴에 품고 잠을 잤다.
수속이 모두 끝났을 때 그는 시가(媤家)에 편지를 띄웠다.
"내가 밤에 그 국문 몇 자 배웠던 것을 가지고 우리 시가 집에다 편지를 했지요. 전라도에다가 편지를 했더니 우리 시아버지가 우리 친정 집으로 왔어요. 그때 철로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걸어서 또 어쩌다가 마차를 얻어 타면서 그렇게 온 것이지요" 시아버지 될 분도 편지를 보고 놀랐었던 것 같았다.
☞◆ 이 기사는 1977년 당시 라철삼기자(동아방송·KBS)가 초기이민자들의 육성 증언을 바탕으로 방송한 내용을 지난해 책으로 펴낸 '아메리카의 한인들'을 정리한 것이다. 하와이이민다큐멘터리<10>편은 2월22일자 (화)에 게재된다. ▶책구입문의: (213)820-8550
정리=천문권기자 cmkn@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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