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이민 다큐멘터리-8] 사진 신부의 우여곡절
신세계 동경·고생 끝에 만난 신랑이 '할아버지'라니…
사진결혼으로 들어온 동포들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한국을 떠나서 일본의 요코하마에 있는 여관에 모인 것으로 돼있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두개의 여관이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사진결혼의 전진기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동영씨가 운영하는 여관이 있고 김종상씨가 운영하는 여관이 있었습니다. 나는 김종상씨 여관에 머물렀었는데 그곳에 나 같은 사진결혼 하러 기다리고 있는 처녀들이 20여명이나 있었습니다. 이동영씨 여관에도 처녀들이 열 대여섯 명 있었습니다."
"대변 검사를 했는데 하면 떨어지고 하면 떨어지고… 3번 떨어지고 4번째는 여관집 딸 어린아이였는데 그 애의 대변을 가지고 갔더니 통과돼서 왔습니다. 그래서 두 달이 뭐야 거의 석 달이나 있다가 출발했지요."
어떤 연유로 이들 여관에 모이게 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요코하마의 이들 한인여관은 사진결혼을 위해 하와이로 떠나는 처녀들이 항상 끊이지를 않았다. 그 곳에서 그들은 한 달도 기다렸고 두 달도 기다렸고 석 달도 기다렸다. 출발하는 배편 때문에 혹은 여비가 도착하지 않아서 늦게 떠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신체검사도 받았다고 얘기했다.
그때 그곳에서 그들에게 뭔가를 가르쳐야 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있었다.
"그때 미국에 들어오는 여자들을 보니까 참 연소한 색시들이더라구요. 그래서 그때 내 생각에 나는 이화를 다니면서 미국의 문화와 풍속을 배웠으니까 저런 여자들에게 얘기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여관에 가서 강좌 비슷하게 해 주곤 했습니다."
이 얘기를 해주신 분은 당시 89살이었던 안정송 할머니이다. 우연이지만 이 할머니는 그 뒤 사진결혼은 아니었으나 하와이로 시집갔으며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신세계 동경한 용감한 여인들
어떤 처녀들이 사진결혼에 응했느냐 하는 정확한 통계는 없다. 동포 1세들의 얘기를 종합하면 대체로 미국이라는 신세계에 대한 동경 때문에 선뜻 응했던 것 같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부모를 모두 잃고 혼자 남게 되자 친척들의 권유로 왔다고 했다. 자기는 그렇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한국에서 "질이 좋지 않았던 여자들이었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었다. 또 시집 갈 돈이 없을 정도로 가난한 여자들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사람들 이었건 간에 그 당시의 우리 형편으로 볼 때 미국으로 건너간 여자들은 용감한 여인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배를 타면서부터 고생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때는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비행기도 없었지요. 배를 타고 와야 하는데 에어컨디션 이라는 것도 없지않아요? 그런데 그나마도 배의 맨 아래층에 있었대요. 그러니 제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얼마나 불편하고 더웠겠어요. 그렇게 24일인가를 왔대요. 그 배에 사진 결혼으로 오는 여자들이 한 50여명이었는데 그 여자들이 그 동안에 뱃멀미를 어찌나 심하게 했던지 미국이고 뭐고 죽는게 낫겠다고 했다는 얘기를 어머니한테서 들었어요."
어머니가 사진결혼으로 들어온 2세 도라 김여사의 얘기다.
죽기를 원했던 항해가 끝나고 꿈에도 그리던 하와이에 도착했지만 곧바로 신랑을 만날 수는 없었다.
◇배에서 내리자 이민국 수용소
"배에서 내리니까 바로 이민국의 수용소로 데려 가더라구요. 색시를 맞아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 호놀룰루가 있는 이 섬이 아닌 다른 섬의 농장에 있었어요. 아마 연락이 잘못된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느라고 이민국에 일주일간이나 갇혀 있었어요."
여관에서 한달 혹은 두 달을 기다렸고 배에서 한달 동안을 시달렸고 그리고 이민국에서 일주일 이상을 기다리다가 만난 신랑은 아저씨 아니면 할아버지뻘 되는 사람이었다.
"나이가 15년이나 20여년 차이가 났지요. 우리 아버지도 15년 위였습니다. 30년 차이나는 부부들도 있었습니다. 우리 어머니 친구는 와서 보고는 울었대요. 보낸 사진은 젊었을 때 찍은 것이었대요. 그런데 와서 보니까 늙은이였으니… 그런데 어떻게 해요. 돌아갈 수도 없고…"
"울었다"는 얘기로 이 사람들의 마음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그저 기가 막혔을 것이다. 하와이가 일본만큼의 거리만 됐어도 그들은 돌아갔을 지도 모른다. 체념과 운명이라는 것을 믿었던 그 당시의 여자들이었기에 그래도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동포들이 이민국까지 나와 달래주었기에 크게 위로를 받았다는 것이 사진 결혼으로 들어온 분들의 설명이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는 한사코 떠나겠다는 신부도 있었다.
◇돌아가겠다는 신부에 "돈 내라"
전 하와이대학 이상억교수 얘기다.
"제가 통역했던 분에게서 직접 들은 얘기인데 자기는 싫다고 왜 그런고 하니 내가 사진 받은 것은 이 사람보다 10년이나 15년 젊은 사람이었었는데 와서 보니 늙어서 싫다고 도로 가겠다고 완강하게 거부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그래요.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통역했던 그분 말씀이 처음에는 달랬다고 그래요. 그러지 말고 이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살아보라고. 어떤 경우에는 이분이 자기 마음대로 위협을 했다고 그래요. '너 그렇게 안 살면 큰일 난다. 400달러를 내 놓아야 하고 또 가는 여비도 네가 내야한다' 그렇게 위협하면 '그럼 아저씨 하라는 대로 해보겠어요' 그런사람도 있었고 또 어떤 사람은 '싫지만 할 수 없다 운명이다' 그렇게 산 분들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실제 여비는 200달러였는데 400달러를 내놓으라고 했던 것은 으름장이었던 것 같다. 어떻든 이렇게 해서 이민국을 나온 신부들은 나이 차이도 많았고 살고있는 형세도 보잘 것 없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열심히 살아갔다.
◇사진결혼신부 모두 1천 56명
한국 유이민사에는 사진 결혼은 1924년 5월 25일을 마지막으로 중단됐다고 밝히고 있다. 중단의 이유는 당시 통과됐던 '동양인 배척법' 때문이라는 설명을 달고 있다.
그러나 그 사이에 951명의 신부가 하와이로 시집을 왔고 1백 5명의 신부가 미국 본토로 시집 갔다. 물론 거의 99%가 10년에서 30년까지 나이 차이를 두고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일단 결혼한 사람은 참을성 있게 살아갔다.
"나이 많은 남편에게 불만이 많았겠지만 참음으로 잘 살았고 자녀들 교육하는 데 전심을 다했고 그리고 아침 4시에 일어나서 5시에 일가는 사람들을 위해 조반을 해주고 점심 싸 주고 저녁도 해주고 그 사람 또 옷 빨아 주고 그런 일을 해서 몇 푼 받으면 그것으로 생활비에 보태 쓰고 그리고는 얼마를 남겨 가지고 자기네 부모가 있는 친정에다가 돈을 보냈습니다. 대개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왔으니까 항상 마음이 아팠겠지요. 그 얼마나 의리 있습니까? 그 얼마나 아름다운 효도입니까?"
아메리카 이민사에서 사진결혼은 동포들의 미국정착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가정을 꾸미면서 이들은 탈선의 길에서 벗어 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보다도 더 뜻이 있었던 것은 줄어들기 시작하던 동포 숫자가 그때부터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다는데 있다.
☞◇이 기사는 1977년 당시 라철삼기자(동아방송·KBS)가 초기이민자들의 육성 증언을 바탕으로 방송한 내용을 지난해 책으로 펴낸 '아메리카의 한인들'을 정리한 것이다. 육성증언이 담긴 방송제작분은 JBC중앙방송을 통해서 2월16일(수)까지 오전9시40분부터 20분간 방송된다.
정리=천문권기자 cmkn@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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