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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마당] 청옥 혼식

김외출/'수필과 비평' 등단

45년 전 함박눈이 내린 어느 날 양가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랑을 다져온 사람과 혼례를 치렀다. 그 당시에 연애결혼을 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우리는 양가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내기까지 태산준령을 수도 없이 넘어야 했다. 그 때나 이때나 자식이기는 부모는 없나보다. 마침내 우리의 진심을 알게 된 어른들이 마음을 열어 주신 것이다

나는 결혼만 하면 인생이 아름다운 무지갯빛으로 펼쳐지리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현실에는 장애가 많았다. 제일 큰 문제는 우리가 살아갈 집 마련이었다. 당시에는 주택이 전부 한옥이라 방 한 칸짜리 셋방은 거의 부엌이 없는데다가 겨울 날씨의 평균 기온이 영하 16도를 넘는 혹한이라 내린 눈이 초봄까지 쌓여 있었다. 바람막이 하나 없는 처마 밑에 솥단지를 걸고 도시락 두 개를 싸서 출근하기란 예사 고통이 아니었다. 몸은 그렇게 힘들었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부자가 부럽지 않았다.

나는 작은 키에 내놓을 명함도 없었지만 결혼 전 주위에서 조건 좋은 사람들의 프러포즈가 더러 있어도 인품이 원만하고 박력있는 나의 남자가 좋았다. 남편은 말단 공무원에다 변변히 가진 것도 없었지만 올곧은 성품에 철인(哲人) 같아 보이는 처신 때문에 내 영혼의 길잡이가 되어 줄 사람으로 믿고 그에게 주사위를 던졌다.

다행이 우리는 맞벌이 부부로 생활의 여유가 조금은 있었다. 신혼 초에는 저축보다는 여행을 즐겼다. 휴가철이 되면 여름엔 친정이 있는 동해로 겨울에는 스케이트장을 누비며 청춘을 만끽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 큰아이를 낳자 상사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게 되었다. 총무처의 공채로 수십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간 직장이라 한편으로는 매우 섭섭했다.



식구 수는 늘었는데 수입은 반으로 줄어드니 형편이 어려워졌다. 하지만 아기가 연약한 입술을 오물거리며 모유를 먹을 땐 내가 엄마가 되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뭉클했다. 새근새근 숨을 쉬는 소리며 평화롭게 잠든 천사같은 얼굴 해맑게 웃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더없이 행복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남편과 서로 다른 문화와 풍습의 차이가 들어나기 시작했다. 반촌의 유교적인 가정에서 자라난 그는 가부장적인 권위의식과 남존여비 사상이 몸에 배어 아내의 위신이나 자존심 따위는 안중에 없고 매사에 순종하는 여인으로 살아가기를 원했다. 나는 신분이 공주에서 시녀로 강등한 것이 억울해서 티격태격하다 보니 집안이 날로 시끄러워졌다. 한때는 좌절의 늪에 빠져 삶의 의욕마저 잃어버린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결혼식 전날 밤 어머니가 울먹이며 하신 말씀이 귓전을 맴돌았다.

"얘야 어미 팔자는 절대로 닮지 마라."

일찍 홀로 되신 어머니는 딸이 엄마 팔자를 담는다는 속담을 두려워하신 것 같았다. 나는 맹목적인 여필종부는 미덕이 아님을 알면서도 가정의 화목을 위해 남편의 뜻에 따라 점점 길들어져 가고 있었다.

세월은 덧없이 흘러 신묘년 정월 우리는 어느덧 청옥 혼식(결혼 45주년)을 맞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산다는 것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이치를 뼈저리게 느꼈다. 늦게 낳은 두 아이를 너무 감싸 키워 설사와 감기를 달고 살았고 작은 애가 천식이 발작하면 자정이 넘어도 업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럴 때 내 서투른 육아법을 자책하며 애들이 가여워 가슴이 아려왔다. 아이들이 잔병치레를 벗어나고 나서도 사춘기며 대학입시 취업 결혼 등 한 순간도 긴장의 끈을 늦출 수가 없었다. 이제는 모두 제 둥지를 찾아 그런대로 제구실은 하고 살아가고 있으니 그런대로 어미 노릇은 한 셈이다.

이제 남편은 정년퇴직한 뒤 잃어버린 청춘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여러 가지 취미생활에 푹 빠져 있다. 나 역시 비록 함량이 부족한 수필을 쓰지만 독자가 읽고 여운이 남는 좋은 글을 쓰려고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다.

인생이 고해라고 하지만 지나고 보니 반드시 가시밭길만도 아닌 듯하다. 행복한 조건을 갖춰도 자신이 느끼지 못하면 행복은 없을 것이다. 젊은 시절에는 속기를 버리지 못하고 아집과 욕심에 얽매여 인생살이가 더 힘들었던 것 같다.

남편은 평생 병약한 나를 청옥 혼이 될 때까지 잘 보살펴 내 삶을 이 정도라도 가꿀 수 있게 만들어 주어서 고맙게 생각한다. 그리고 가족이란 끈에 매여 삶의 무게를 느끼며 열심히 살아준 남편에게 감사하며 사랑한다.

그러나 이제 와서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사회의 그늘진 곳에 좋은 일 하나 한 것 없이 자신의 안일만을 위하여 살아 온 이기적인 삶이 부끄럽다.

창밖에는 45년 전 그날처럼 눈송이가 수많은 나비들의 군무처럼 내리고 있다. 남은 인생 숫눈위에 새겨진 발자국처럼 건정(乾淨)하게 살아가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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