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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바라크, 조용하지만 살벌한 카리스마…최대한 적 안 만들고 2인자·도전자 제거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83) 대통령이 권좌를 유지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 식물인간 신세다. 5일로 12일을 넘긴 퇴진 요구는 가라앉을 기미가 없다. 무바라크는 중동 최대 인구(약 8000만 명)의 나라를 1981년부터 30년간 통치했다. 근대 이집트 역사에서 최장 집권이다. 6년 임기 대통령을 5선이나 했다. 시위 사태를 맞은 외신들은 무바라크의 30년 통치 기술과 그 한계에 눈길을 돌리고 있다.

그는 73년 이집트 국민의 한을 풀어준 전쟁 영웅이다. 이집트는 48년 주변 아랍국가들이 이스라엘의 건국을 막으려고 벌인 제1차 중동전쟁에서 형편없이 패했다. 게다가 67년 '6일 전쟁'에선 이스라엘의 기습으로 거의 궤멸됐다. 시나이 반도를 빼앗기고 수에즈 운하 코앞까지 이스라엘군의 진주를 허용했다.

무너질 대로 무너진 이집트인의 자존심을 세워준 인물이 무바라크였다. 73년 이스라엘을 상대로 한 '10월전쟁' 당시 공군 사령관으로 전투기들의 기습 공격을 주도했다. '언제나 이기는' 이스라엘군의 신화를 무너뜨린 1등 공신이 됐다. 북한의 공군 전력 지원을 얻어내기도 했다. 그 공로로 75년 안와르 사다트 당시 대통령에 의해 부통령으로 지명됐다. 28년 나일 삼각주에서 가난한 하급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소련 유학을 한 폭격기 조종사가 국가의 2인자가 된 것이다.



그는 처음엔 조용한 카리스마를 보여줬다. 무바라크는 81년 사다트가 이스라엘과의 수교에 불만을 품은 이슬람주의자 군인들에게 암살을 당한 뒤 4대 대통령이 됐다. BBC방송은 "그때까지만 해도 조용하고 자신을 거의 드러내지 않던 무바라크가 어떻게 30년을 집권할 수 있었는지 흥미롭다"고 지적했다. BBC는 무바라크의 '무색무취' 성향이 그의 정치 수명을 늘리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고 분석했다. 아랍민족주의를 내세우며 친소련 정책을 폈던 가말 압델 나세르 2대 대통령 친미개방 정책을 내세우며 이스라엘과 수교를 했던 나세르 3대 대통령과는 달리 그는 조용히 무색무취의 노선을 걸었다.

그는 89년 2인자로 통하던 무함마드 아부 가잘라 국방장관을 해임한 것을 제외하곤 정권 내에서 별다른 잡음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 조용함 뒤에는 살벌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무바라크는 적도 만들지 않지만 2인자나 도전자도 허용치 않았다. 야당은 아예 싹을 잘랐다. 제대로 야당 활동을 하려고 드는 인물은 감옥이나 정치범 수용소로 보냈다.

게다가 그는 집권하면서부터 지금까지 '비상계엄법'으로 국민을 통제했다. 이 법은 야당을 말살하기 위한 법이나 다름없다는 평을 서방에서 받아왔다. 유권자 등록은 투표 1년 전에 그것도 경찰서에서 하도록 했다. 야당을 찍기 위해 등록한다는 것은 감옥이나 수용소에 갈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모든 투표는 보안요원의 입회 아래 경찰서나 공립학교에서 공개적으로 치러졌다. 게다가 무슬림 형제단을 비롯한 적대 단체의 정당 등록은 아예 거부했다. 이뿐만 아니라 이들을 테러단체로 몰아 탄압했다. 말 그대로 '1당 독재' 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2005년이 돼서야 서방의 압력으로 대통령 선거를 직선제로 치렀으나 그 전까지는 찬반투표였다.

그의 행운은 권력 세습으로 끝났다. 아랍어로 무바라크는 '축복받은 사람'을 뜻한다. 호스니는 '최고'라는 뜻이다. 지난 30년간의 정치 이력에서 그는 최고로 축복받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행운은 2011년이 되면서 유효기간을 다했다.

가장 큰 이유는 권력세습이다. 그는 집권당인 국민민주당의 서열 3위 정책위원장을 맡고 있는 차남 가말에게 권력을 세습하기 위해 은밀히 공작해 왔다. 사실상 집권당 대표만 대통령이 출마할 수 있도록 법을 고쳤다. 가말을 집권당 대표로 앉혀 9월에 있을 형식적인 대선에서 권력을 물려주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는 이렇게 국민을 한계까지 몰아가며 인내심을 시험했다.

그러자 국민은 '키파야(충분하니 그만하라는 뜻의 아랍어)' 운동을 일으켰다. 키파야는 과거 2005년 첫 직선제 대선(무바라크는 여기서 승리했다)을 앞두고 야당에서 만든 정치구호다. 게다가 4일엔 그와 그의 일가의 부정 축재 규모가 700억 달러(약 78조1900억원)라는 영국 가디언의 보도까지 나왔다.

2011년 2월 5일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선 페이스북.트위트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이용해 집결한 국민이 "키파야"를 외치며 시위를 시작했다. 통금령을 내려도 경찰이 최루탄을 쏘고 사격을 해도 군이 진주해도 시위는 멎지 않았다. 무바라크는 빈사의 사자 신세가 됐다.

그는 북한과 친했다. 90년대까지 친북 인사였다. 73년 공군사령관으로서 10월전쟁을 치르면서 북한의 공군력 지원을 받았다. 이집트에 실망한 소련도 지원을 거부했지만 북한은 조종사를 보내주었다고 한다. 당시 북한은 이스라엘을 상대로 한 기만 작전을 제안하는 등 상당한 활약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뒤 대통령이 된 무바라크는 북한을 세 차례 방문했다. 이집트 군사박물관에는 90~93년 북한 지원으로 개조 공사를 했다는 기록이 하얀 돌 위에 검은 글씨의 한글로 적혀 있다. 북한의 각종 장거리 미사일도 이집트가 소련에서 받은 스커드 미사일을 제공받은 것이란 주장이 있다. 그는 북한과의 의리를 지킨다며 "김 주석 생전에는 한국과 수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김일성이 사망한 이듬해인 95년 한국과 대사급 외교관계를 맺었다. 그는 98년 김정일 총비서에게 남북한 평화공존의 필요성을 강조한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99년 방한한 그는 방적공장과 조선소 등 경제적 실리를 챙긴 뒤 김정일을 설득해 남북대화를 중재하겠다고 제안했다.

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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