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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마당] 냉장고

김영애 / 재미수필문학가 협회이사

새 냉장고 앞에 선다. 스테인리스 문이 유난히 반짝이는 데도 흰빛 옛 냉장고보다 부엌을 어둡게 하는 듯하다. 새 냉장고는 사람 숨소리 같은 모터소리를 낮게 지속하다 얼음을 만들 때면 키 크는 꿈에서 갑자기 깬 듯 딸그락 딸그락 소리를 더한다. 게다가 밤중에 조명 버튼이라도 누를라치면 삑삑 소리를 내며 눈을 감았다 뜨듯 살아 있는 기척을 한다.

어느 날 아침 헌 냉장고의 가슴앓이인 듯한 하얀 성에와 싸늘한 물 분자의 죽음 같은 얼음들이 냉장실에 두껍게 매달려 있음을 발견했다. 긴 고드름으로 칸마다 이어진 얼음은 추운 겨울 추위에 발이 묶여 얼음기둥으로 변한 폭포수 같았다. 매일 문을 열고 닫으며 분신같이 동고동락한 나는 냉장고의 통증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아마 냉장고는 마음고생과 말 못할 고뇌가 많았나 보다. 해결 못한 문제들이 가슴에 흰 안개같이 차오르다 끝내는 마음까지 얼게 한 듯싶다. 모든 것을 주관하는 냉장고가 얼자 냉장실 음식들도 얼음 옷을 입은 채 긴장 속에 몸을 떠는 듯했다.

나는 우선 알래스카의 빙하같이 차가워진 얼음을 고기 다지는 망치로 마구 깨어냈다. 깨지는 얼음은 냉장고의 아픔처럼 비명을 지르며 쪼개져 나갔다. 그리고 그것은 흐르는 눈물처럼 부엌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거의 깨져 고민의 결정체들이 사라졌다고 생각됐을 때 냉장고는 미열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이상 타협하기 싫은 심장의 모터 때문인지 그 큰 몸을 달구며 고열로 변했다. 말 못할 냉장고의 가슴속 응어리는 무엇이었을까.

생각 끝에 냉장고 수리공을 불렀다. 수리공은 파란 열 빛으로 능란하게 얼음을 녹여내고 메스로 살을 도려내듯 연결된 벽을 매끄럽게 분리했다. 아버지같이 체격이 커 언제나 의지가 됐던 냉장고는 불편해서인가 덩치에 비해 야물지 못했다. 작은 수리공에 의해 정맥과 동맥 같은 붉고 푸른 전열선들이 꺼내졌고 닫혀있던 심장과 내장들이 그 실체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한참 동안 두꺼운 안경을 쓴 채 몸 안을 검사하듯 유심히 살피던 수리공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심장 같은 모터가 힘이 다했습니다." 그랬다. 냉장고는 잠시 심장이 마비되었던 듯싶다. 예사롭지 않게 큰소리로 그르렁대는 것을 무시했으니 냉장고의 통증은 얼마나 심했을까. 수많은 냉장고 중에 특별히 내게 인연 닿은 냉장고가 폐기처분 된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슬퍼진다. 나의 삶을 이으려 죽은 생명들을 산목숨같이 싱싱하게 보존시키며 자신의 숨이 다하도록 몸을 내주던 녀석이 아닌가. 새집에 처음 들어와 쌓인 정이 얼음에 녹은 물방울처럼 뚝뚝 떨어진다.

생각해 보건데 밀폐된 헌 냉장고는 거친 바깥세상을 차단시켜 어머니 품안 같은 아늑함으로 모든 것을 감쌌다. 그래서인가 바깥세상의 네 계절까지 작은 품 안에 그대로 간직했다. 빨간 봄 딸기며 커다란 여름 수박 그리고 정물 같은 가을 감과 싱싱한 겨울 사과가 잠자고 있다. 동정심 많은 냉장고는 삶에서 버림받을 자연의 열매를 잠시라도 마음 나누며 보호한 임시 열매 탁아소였다. 지난 여름 마켓 안에는 바닷물고기들이 아가미를 늘인 채 줄지어 배열돼 있었다. 소라 게 해삼 그리고 멍게 등 마치 푸른 파도의 남해 바다가 물이 빠진 채 시장으로 옮겨온 듯했다. 화장을 하거나 장례를 치르지 못한 죽은 생선들 중 마켓을 통해 옮겨온 곳은 우리 집 냉장고였다.

바다에서 항상 깨어 있던 생선의 혼같이 언제나 맑은 영혼이기를 바란 나는 냉장고에 그 시신을 보관했다. 냉장고의 생선은 바다를 만나기 전의 강물 같았다. 혈관같은 강물이 세상을 흐르고 흘러 바다와 하나되듯 생선도 나의 몸을 돌고 돌아 몸과 하나를 이룬다. 활기찬 지느러미를 흔들며 바다에서 살았을 생선보다 더 날찬 삶을 사회라는 바다에서 살 수 있도록 내 몸의 일부를 채워줄 생선이 머무는 냉장고. 그것은 바다를 만나기전 강이 안주하는 곳이다.

어찌 보면 냉장고는 멋진 연출가였음에 틀림없다. 초원의 풀을 뜯으며 한평생 사람을 위해 몸을 바친 눈물겨운 소의 사랑을 살과 피 그리고 그 젖까지 보존해 보시의 삶을 아름답게 승화시켜 표현해 주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냉장고는 위대한 마술사였다. 물을 얼음으로 만들고 언 물건을 녹이는 마술을 할 뿐 아니라 부패시간을 잠시 정지시키는 요술을 부린 까닭이다. 게다가 흰빛 냉장고는 환상의 케이크를 사랑의 따뜻함으로 가슴에 머금었다 상기된 마음을 그대로 전해주던 우리 집 행사의 도우미였다.

옛 냉장고는 십오 년 동안이나 면벽을 보며 묵언 수행을 했던지 큰 몸을 내민 채 말없이 한자리를 지켰다. 사각형의 냉장고는 부엌 한 구석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자기 가슴의 온갖 것들이 들어오고 나감에 *방하착(放下着)을 하는지 그것에 연연하지 않고 또 매이지도 않았다. 흰 옷을 입고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의 선정삼매에 든 냉장고는 비와 그늘과 해의 자연을 그대로 담았다. 깊은 산 그늘에서 비밀스레 세월을 익힌 고사리와 넓은 들판의 풍성한 여유가 몸을 이룬 호박 같은 천연이 언제나 그 안에서 숨쉬고 있었다.

헌 냉장고가 병이 나자 나는 노아가 방주로 생명체를 옮기듯 음식들을 그릇 배에 차례로 실었다. 오 년 전 이모가 남기고 간 한국 고춧가루며 이 년 전 된장찌개에 넣었을 마른멸치들 존재조차 잊었던 물건들이 잊혀진 기억처럼 구석구석에서 손짓을 했다. 추억에 싸인 물건들을 꺼내다 보니 큰 자루를 채우고도 남을 만큼 많았다. 새로움은 비어야 채워지는 것인데 숨쉬기조차 힘들게 포개진 채 부대꼈으니 녀석은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무던한 냉장고는 잡다한 것을 채우거나 텅 비워 놓아도 노여움 없이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언제 한번 냉장고의 고통과 마주 앉아 본 일이 있었던가. 과함이 모자람보다 못한 것을 몰랐던 나는 채우기 위해 얼마나 안간 힘을 썼을까. 하루 종일 여닫는 냉장고 문같이 정신없이 바쁘게 살다 텅 빈 냉장고처럼 삶이 공허해지면 잃어버린 욕망으로 끝없이 채우려 했던 나였다.

내 숨결소리를 닮은 냉장고 앞에 선다. 텅 빈 침묵 속에 나는 어느덧 냉장고가 되어진다. '나라고 하는 냉장고는 자신을 지운 냉장고처럼 소리 없이 베풀고 인연 따라 넣어지는 세상 모두를 분별없이 품을 수 있을까?'

문득 한 생각이 얼음되어 떨어진다.

* 방하착: 마음을 버리고 내려놓음

* 행주좌와: 움직이거나 머무르거나 앉거나 눕는 순간

* 어묵동정: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는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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