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점프 업 - LA] "엄마의 '그림보는 눈' 딸도 그대로 빼닮았죠"
'표 갤러리' 母 표미선 대표 - 女 하이디 장 큐레이터
女 "최고의 롤모델 엄마 계셔 큰 행운"
# 40여년 전, 여고생 표미선의 놀이터는 학교 미술실이었다. 외교관이 되고 싶었던 표미선에게 담임 선생님은 “여자는 미술도 괜찮아. 너 미술반에서 많이 놀았잖아”하며 미대 진학을 추천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림에 빠진 표미선은 학교 졸업 후 미술 시장에 뛰어들었다. 사람 만나고, 사업하는게 좋았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화랑일이었다. 표 갤러리(PYO Gallery). 그녀가 설립해 30여년을 이끌어 온 화랑이자 한국 미술계를 대표하는 브랜드다. 이제 표미선은 이태원과 청담동, 베이징과 LA에 갤러리를 거느린 한국 미술계의 가장 영향력있는 인사 중 한 사람이 됐다.
# 20여년 전, 초등학생 하이디 장의 놀이터는 화랑이었다. 늘상 세계적 주목을 받는 화가들의 작품을 보며 자랐고, 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책도 많이 읽어 또래 아이들보다 영특하고 다부졌다. 방송반에서도 활약했다. 음악과 무용에도 소질이 있었다. 특히 발레는 수준급이었다. 하지만 엄마가 ‘너 발레할래, 미술할래?’ 묻자 하이디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미술이요!” 엄마는 빙긋 웃음 지었다. 그 어린 나이에도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고 엄마 출장길을 따라 다니며 제법 큐레이터 역할을 했던 딸이었으니까.
딸 하이디 장이 미술로 진로를 정하자, 엄마 표미선은 단순한 ‘인생 선배’가 아닌 커리어적 ‘롤 모델’로도 최선을 다했다. 15살부터 LA로 유학보내 미술로 유명한 샌타모니카 크로스로즈 스쿨을 졸업시켰고, 대학 진학을 앞두고는 함께 유명 미술 대학을 샅샅이 다니며 진로를 모색했다. 엄마는 어려서부터 순수 회화를 잘 해왔던 딸을 세계 초일류 대학인 예일 미대에 보내야겠다 내심 마음 먹고 있었다. 하지만 딸은 똑부러졌다.
UCLA에 가겠다는 것. 미술사와 예술행정도 함께 공부해 엄마처럼 화랑 일을 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엄마는 다시 한번 빙긋 웃음을 지었다. 딸의 ‘그림 보는 눈’을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자기 그림보다 더 독창적 그림을 그린 다른 친구 그림을 먼저 들고 와 보여주더라고요. ‘난 그림을 만드는데, 이 친구는 그림을 그리는 것 같다’는 얘길 하길래 놀랐었죠. 어린 아이에게 이런 안목이 있구나 싶었어요.”
딸은 미술 안에서도 자신의 적성을 잘 알고 있었다. 직접 작품 활동을 할 수도 있었을테고 큐레이터나 교육자의 길도 갈 수 있었겠지만, 하이디 장의 선택은 한결 같았다.
“어려서부터 사업에도 관심이 많았고 새로운 분야 사람을 만나는 것도 좋아했어요. 화랑 일이란 게 결국은 사업이자 작가,고객 등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잖아요. 제가 좋아하는 미술로 다양한 사람을 만나 사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일의 매력이라 생각했죠.”
졸업 후 하이디 장은 잠시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미술관이나 다른 화랑을 기웃거려봤다. 하지만 곧 어머니 표미선 대표의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바로 표 갤러리의 일을 시작했다. 마침 세계 시장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한 표 갤러리에 하이디와 같은 인재가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트페어 참가나 해외 지사 설립 등 중요한 사업을 도맡아 처리했다. 그리고 2008년에는 표갤러리 LA의 디렉터로 임명돼 모든 전시기획과 운영을 책임지기에 이르렀다.
어머니는 자신의 뒤를 이은 딸이 대견하고 기특하기만 하다.
“갤러리 운영이란 게 보는 것만큼 화려하고 좋기만 한 일은 아니에요. 어려움도 많죠. 게다가 저희 세대에만 해도 아무런 계획이나 체계 없이 주먹구구식으로만 일하고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어요. 하지만 제 딸은 학문적 기반도 탄탄하고 행정력도 뛰어나고 꿈도 커요. 옆에서 가만 지켜보면 그림 하나, 조각 하나 들고 옮기는 것도 어찌나 당차고 야무진지 몰라요. 사람들 상대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엄마의 표 갤러리를 이어가야 한다는 책임감도, 부담도 있겠죠. 하지만 제 눈엔 그저 다 자랑스러울 뿐입니다.”
딸의 어깨는 무거울 수 밖에 없다. 그래도 어머니가 있어 한없이 든든하다.
“어릴 적엔 특히 부담이 컸어요. 하이디 장이란 이름보다 ‘표미선의 딸’로 먼저들 아셨으니까요. 하지만 이젠 엄마가 계시기에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고, 다른 누구보다 빨리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커요. 남들은 롤모델을 찾아 헤매는데 전 최고의 롤모델이 언제나 곁에 계셔주시니 얼마나 큰 행운이에요.”
물론 일을 하다 보면 의견 충돌도 생긴다. 엄마 표 대표가 포기를 모르는 저돌적 여장부 스타일이라면 딸 장 디렉터는 철저히 계획하고 은근하게 다가서는 지략가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표 대표는 문제 상황에서 될 수 있는 한 타협점을 찾아 원만한 해결을 추구하지만, 장 표 대표는 원칙을 고수하는 편이다.
표 대표는 “자랄 땐 단 한 번도 엄마에게 ‘싫다’는 소리를 해 본 적이 없는 아이인데, 일을 하면서는 ‘그건 아니죠’, ‘그렇게 하시면 안돼요’ 라며 딱 잘라 말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며 웃는다. 하지만 “항상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기 때문에 결과는 좋을 수 밖에 없다”고도 덧붙였다. 장 디렉터 역시 “아직 나이가 어려서인지 엄마보다 좀 느긋한 편이긴 하지만, 누구보다 에너지 넘치고 실행력 있는 엄마를 많이 존경하고 닮고 싶다”고 맞장구쳤다.
문득 2대째 내려온 미술인, 갤러리 운영가로서의 삶을 3대째까지 물려줄 생각은 없을까 궁금해졌다. 마침 하이디 장 디렉터가 지난달 초 첫 아기, 그것도 딸을 낳았다. 은근히 의중을 묻자 갤러리를 운영하는 스타일처럼, 표 대표는 시원시원하게, 장 디렉터는 신중하게 대답을 한다.
“우리 손녀딸이 백호랑띠라잖아요. 활발하고 곱게 잘 커서 나중에 우리 뒤를 이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는 하고 있죠. 그림 판매를 위주로 하는 갤러리가 아닌, 우리만의 성격과 색깔을 갖고 있는 그런 표 갤러리로 말이죠. 항상 새로운 작가를 찾고 젊고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 가는 표 갤러리의 미래를 지금부터 꿈꾸고 있습니다.”(표)
“아직 태어난지 며칠 되지도 않은 딸에게 그런 기대를 하는 건 너무 빠르지 않을까요. 엄마라고 그 무엇도 강요할 수는 없을테니까요. 하지만 자신이 원한다면 어머니가 저에게 하셨듯 아낌없이 지원해줘야죠. 저는 그 전까지 LA는 물론 세계 어디에서나 표 갤러리의 이름이 통할 수 있도록 화랑을 키워나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장)
글·사진=이경민 기자 rachel@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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